한줄 詩

서른의 방학 - 류성훈

마루안 2020. 8. 20. 19:26

 

 

서른의 방학 - 류성훈


당연한 듯 걷다, 줄어든 팔뚝을
슬쩍 잡을 때, 미열이 건너온다
매번 채워야 하는 내 배가 번거롭고
안도,라는 단어가 문득 생각나지 않을 때

젊은 구름들에게도 미소한 끝들이 있어
식은 그릇 같은 저녁을 골목 어귀에 두고
두꺼워짐에 서투른, 제 몸 나이테 어디쯤
넋을 태우는지 모르는 나무들이
깨끗한 발과 함께 멈춘다 닳을 일 없어
너와 네 헛된 옷깃을 부검하듯
살아 더 눈부신 목소릴 자꾸 긁는다

바지 뒷단이 끌리기 시작할 때
터진 종량제 봉투처럼 쏟아지는 저층운을
볼 수 있을 때, 녹이 앉은 줄만 괜히 뚱겨 보다
어스름 뒤편에 얇은 이불을 펼 때
오늘의 예보는 어떤 국지성 호우도 적중한다
앞으론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모든 허기가
따뜻한 우유처럼 목을 넘어가기를, 새벽
세 시의 쓰레기차 번호를 외우면서

아직도 역전,같은 말처럼 촌스럽고
제 발가락이 밉지 않을 방법만 누워서
궁리하는 시절이 있었다 앵글로 만든 책장이
외로운 공기만 붙잡다 놀이처럼 녹 피우는
잠시, 서른의 방학이 섣불리 지나간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소서 - 류성훈


지루한 장마가 팥빵 두 개와 찹쌀 도넛 한 봉지를 들고 현관 앞에 선다 주전자가 빗소리를 뭉근하게 데울 때 나는 안경을 낀 채 조는 아버지에게 꿈이 더 잘 보이긴 하겠다,며 웃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오랜만이지 엄마
바깥 하루는 날씨 얘기로 시작되고
한 가족의 밤도 날씨 얘기로 끝나게 되겠지
사실 비 얘기는 아니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여름과 할 수 있는 게 더 없었던 지난여름이 차례로 수박 조각을 집는다 이거 아직은 맛이 없다고 내가 어색하게 말했지만 그런 말은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차 좀 마시자고, 아무리 늦어도 한 잔은 괜찮다고 우기기에 좋은 날 선풍기 방향을 맞추면서 이렇게 늦게 마시면 밤을 꼴딱 새울 텐데,라며 정말 느지막이 잠드는 그들을

나는
오래 보고만 싶었다



 

# 류성훈 시인은 1981년 부산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숭의여대에 출강하고 있다. <보이저 1호>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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