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식탁에 수저를 올리는 일 - 박일환

마루안 2020. 7. 9. 22:49

 

 

식탁에 수저를 올리는 일 - 박일환


어둠이 안개처럼 부드럽게 밀려오는
저녁 무렵이어야겠다
식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놓는 일로
세상의 소란함을 잠시 덮는 동안
힘겨웠던 하루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식탁은 풍성하지 않아도
불평을 모르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오랜 습관처럼 나란히 자신의 옆을 내어줄 뿐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몫이었으니

오늘 누가 목구멍 깊이 울음을 삼켰는지
묻지 말기로 하자
다만 식탁에 수저를 올려놓듯이
경건한 마음만 간직하기로 하자

당신의 부어오른 손등을 가만히 끌어당기는
저녁 무렵은 아무래도
저 가지런한 숟가락과 젓가락 위로
가여운 한숨처럼 스며들어야겠다

*시집/ 등 뒤의 시간/ 반걸음






슬픈 현대사 - 박일환


그녀의 발꿈치에 반했다는 말
거짓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늘씬한 여자를 좋아하거나
애교 넘치는 여자를 좋아하거나
지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있지만
남자들은 천성이 바람둥이라서
그리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

그러니, 당신에게 반했어요
라고 말하는 남자들은
더 늘씬하고, 더 애교 넘치고, 더 지적인 여자를 만나면
태연하게 똑같은 말을 늘어놓을 것이다

사탕발림에 넘어간 여자들이 후회하는 동안
다른 여자들이 사탕발림에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우리 현대사와 놀랄 만치 닮았다

늘씬하고, 애교 넘치고, 지적인 여자들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은유는 언제나 현실 앞에 무력하지만
때로는 은유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실도 있다

그녀의 발꿈치에 반했다는 말 역시
하나의 은유일 수 있다
다만 하고많은 중에 발꿈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당신에 대해서는 존경을 보내고 싶다

우리 현대사는 지금껏 너무 거대하고 그만큼 우울했으므로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배신마저도 화려하게 치장하는
바람둥이들의 나라에서
발꿈치에 반했다는 말은 상큼하기조차 하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는
가려진 발꿈치를 들여다보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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