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흐린 날에 갇혀 - 윤의섭

마루안 2020. 7. 8. 19:23

 

 

흐린 날에 갇혀 - 윤의섭


기후엔 늘 예민하였다
가령 일기 예보라는 가장 새롭고 비인위적인 뉴스에 끌리는 것인데
간빙기를 사는 운명은 시한부에 익숙하다
화창한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날씨를 상징으로 만든 건 샤머니즘도 신비주의도 아니다
겨울은 고난 봄은 희망 눈보라는 시련 단비는 쾌락
날씨에 인간사를 빗대 놓고 우린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항상 바뀌는 날씨는 사람의 일생과 닮았으므로

다만 언제 끝날지 모르고 끝없을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질 때
길고 긴 슬픔의 장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찰나라도 영원한 듯 저미는 이별의 혹한을 사는 중이거나
메마른 가뭄의 땅을 맨발로 걸어야 하는 절망이 이어질 때
어떤 날씨는 죽어서야 바뀐다
그러니 깨지지 않는 상징은 죽음에 가깝다

며칠을 자고 일어나도 두꺼운 구름에 뒤덮여 흐린 날이다
삶 쪽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카드 - 윤의섭


이 몇 장의 그림 속에 일생의 전모가 들어있다
그림을 고른 건 나라고 책임을 전가해도
다가오지 않은 날들의 풍경이 고대부터 그려졌다는 거

조금 무서워요

아까부터 들려오는 음악은 사계였다
가을쯤에서 무너질 수 있다고 낙엽 같은 카드를 읽는다

떠나보낼 수 있다는 예언
생기지도 않은 일을 부정하는 건 생겼던 일을 부정하는 것이고

창밖엔 장대비였다 빗줄기로 지워진 길에 물길이 생기고 다시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는 미래라면 내가 지워 버린 무수한 길은 숙명이며 숙명이 아닌 일방 통로

그날
새소리가 들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새소리가 들려왔다
산길이었고 너는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같이 산을 오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만 울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새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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