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동굴 - 김호진

마루안 2020. 6. 29. 22:09

 

 

동굴 - 김호진


사실은 나이란 놈이 사는 집이다
그렇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동굴을 만드는 일이다
박쥐처럼 웅크리는 일이다

나이 들수록 먹은 음식,
반은 위로 들어가고 반은 이빨 사이 갇힌다
빙하를 닮은 하얀 이빨이 거느린 귀여운 크레바스 속으로,
목구멍보다 어둑하지 않으니 일단 별장이라고 해두자

사실 몸에 생긴 수많은 동굴의 문패는
대체로 조금씩 아프거나 애잔하다
쓸쓸함이란 문패는 발가락이 꼬물거려
오히려 깊은 동굴이 아니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아, 입 벌리고 있는 어두운 동굴들.
소낙비에 숨긴 울음 같이 아득한 구멍,
그 검은 웅크림이 문패다

4억 5천만년 웅크린
양방산 자락 켜켜이 어둠 덫댄 검고 긴 동굴에선
엷은 햇살이 비집어 놓은 언어의 무늬 따라
종유석이 주름치마를 접었다 폈다

아픔처럼 오래 웅크려 익은 탓에
햇살을 빼닮은 검은 소문이 자욱한 거다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 시와반시


 

 



춤이나 추자 - 김호진


책을 오래 읽었더니
눈이 침침하다

내용은 천지불인*이고
내 눈은 천 길 낭떠러지에 걸렸다

원치 않게 매달렸어도 경치에는 쉽게 홀렸는데
세상은 이렇듯 늦게 와서 꼭 등 뒤에서 핀다
기껏 배꼽 근처에서 봄 향기는
징징거리고
속눈썹엔 눈보라가 가득 담겼다 진다

책 속의 복잡한 문장처럼 장마는 언제나 길고
낙엽 대신 우렛소리가 발등을 찧는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세상아. 이제 네가 나를 읽어라
종일 파도처럼 일렁이는 나를 읽어봐라
너도 나처럼 난독일까

그럼 복수다

자, 이제, 우리, 그만, 책 접고
눈 먼 둘이서 한바탕 춤이나 추자


*천지불인: 도덕경 5장에 나오는 말로,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는 의미로, 천지는 다만 본래대로 움질일 뿐이라는 뜻


 

 

*자서

낮은 산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야생화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한 게 한참 됐다.
이름조차 낯설다.
오랫동안 먼 곳을 쏘다녔기 때문이다.
해답이 먼 곳에 있을 것 같아 별자리를 외우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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