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맛 감별사 - 이철수

마루안 2020. 6. 30. 19:29

 

 

맛 감별사 - 이철수
-돈맛


메주 뜨는 냄새가 나네, 어디
상한 꼭지에서 구린내가 난다
뚜껑을 열자 아주 물러진 값이 칠푼이다
오래 묵어서 부패해진 본성인데,
그래도 그렇지, 누가 누룩의 맛이라고 했나 터무니없이 단맛이다

어떤 입은 제 맛을 들키지 않으려고 설익거나
곰삭을 대로 곰삭거나 아예 새까맣게 그슬려서 귀를 닫고
살금살금 어떤 혀로도 읽어낼 수 없도록 불가해한 속내를 숨기기도 하는데
이 은밀한 맛은 그러나,
대단히 직설적이고 절대적이며 독보적이다

이 깊은 맛에 혼을 빼앗기고 몸을 망친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고래(古來)로 그 집 앞마당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수효는 얼마고,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처럼
그 맛에 들려 천국을 파는 사제(司祭)들이 지금도 넘쳐난다니,
가히 구리고 독(毒)하고 쿰쿰한 그 맛, 가질수록 더 커지는 갈증으로 몸을 태우는
아편 같은,
이 맛에 취하면 죽음까지도 마다않고 덤빈다는데,

아, 그런데 이 엑스터시를 왜 향정신성 물질로 분류하지 않는 거지


*시집/ 무서운 밥/ 문학의전당


 

 



무서운 밥 - 이철수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들과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거룩한 일
밥을 먹는다는 것은 행복한 모험
얼얼하게 휘어진 생의 등뼈를 곧게 펴는 일
지는 해를 끌어다 허리춤에 묶고 내일 아침 다시
동편 산봉우리 위로 불끈 밀어 올리는 거대한 힘

뉘엿뉘엿 석양마루 끝에 앉아 여지껏
밥을 먹는 구순(九旬)의 아버지여,
찬 구들에 불 들어가듯 아버지 몸 안으로 뜨신 밥이 드신다
아들이 아버지의 수저에 아직 상하지 않은 해의 싱싱한 속살을 발라
한 점 한 점 꽃잎처럼 얹어드린다
버짐꽃 핀 구순의 아버지가 수저 쥔 손을 바르라니 떠신다
아버지, 밥이 흔들려요 밥알이 어지러워요
흘린 밥알들이 무릎 위로 쿵하고 주저앉는다
무릎뼈가 삐걱하고 꺾이는 소리,
저 천근(千斤)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아버지여,

요단강을 건너는 듯 멀고 고단한 밥의 행렬
평생 밥의 신전을 떠나지 못하고 그 지존의 문을 지키셨던 아버지가
이제 밥의 입구에서 일생의 입질을 회개하시는지
덜덜덜덜 손을 떠신다 삐질삐질 땀 흘리신다

밥상이 온통 노을빛이다



 

 

# 이철수 시인은 전남 영암 출생으로 1998년 <문학춘추>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벼락을 먹은 당신이 있다>, <무서운 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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