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알약들의 왈츠 - 이소연

마루안 2020. 6. 17. 21:56

 

 

알약들의 왈츠 - 이소연


복용지침서를 무시한다는 건
살고 싶다는 걸까 죽고 싶다는 걸까
약을 먹이려고 하면 우는 아이 앞에는
여섯 시간마다 사막이 펼쳐진다

소분된 알약은 하루치의 발자국 같아서
사라지길 좋아하고
글씨들은 자리를 바꾸다 실수를 저지른다
수지 아니면 지수가 새처럼 무관한 봄볕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왈츠를 가르친다

사람들은 내 위로 잠이 쏟아졌다고 한다
분명, 춤을 따라 췄는데

왈츠,
이게 혹시 잘못 지은 약이라면
아이가 뒤바뀌듯 남의 약을 집어온 거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까 봐
나는 자꾸 약을 아낀다
먹지 못한 약이 남아 있어도
나는 호전되고

증상이 다른 사람이 내 약을 대신 먹고 죽는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약사를 사랑하던 사람이 해준 이야기

요즘 약사들은 처방전 없이는 약을 짓지 않지만
우리는 왜 우리가 남긴 걸 떠맡기는지
내가 버려두고 온 자리에서 여전히 왈츠를 추고 있는
지구 위로 잠이 쏟아져 내린다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사람

 

 

 

 

 

 

절제술 - 이소연


나는 나쁜 피로 살아갈 사람, 너를 제거한 날로부터
한주먹의 용기만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줄줄이 연루된 문장을 예방하기 위해
나는 습관적으로 양배추를 찜통에 찌고 된장을 볶았다

벼락처럼 무너지는 것과
번개처럼 녹는 것을 차례로 떠올리는 밤이 있었다
낮에 아는 사람과 만나 헤어지고
밤에는 안색이 나빠져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거울을 보며 처진 입꼬리를 낫으로 쳐냈다
나는 긍정적이다 부정적으로
책 속에서 혼자 번진 글자가 아름답구나
주름살은 자꾸만 허공을 움켜쥐려 할 것이고
고막은 여름내 녹슬어가는 방울 소리를 들을 것이다
불빛은 나를 입었다가 벗었다 하는 야행을 잊어가겠지



 

# 이소연 시인은 1983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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