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득한 내일에게 - 김사이

마루안 2020. 6. 15. 21:13

 

 

아득한 내일에게 - 김사이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된 마을

도시 뒷골목에서 싸게 일하는 앳된 이주민 여자들

깡촌에도 가랑비처럼 스며들었다

국내 여자를 사랑하지 못해 반백이 된 동창은

갓 스무살 필리핀 처녀를 사랑했단다

아이를 가졌다고 나를 곁눈질하는 엄마가

사람만 좋으면 되지 않겄나며 중얼거린다

맞아요, 사람만 좋으면 되는데

사람이 사람이고 또 사람이 사람이라고

 

논밭을 팔고 몸을 팔고 절망을 팔아서

아이가 파랑새를 찾으러 떠날 수 있다면

노동이 죽은 땅에도 다시 씨앗을 심을 수 있다면

다민족 아이들이 다국적으로 고르게 자라날 텐데

 

인간의 피는 색이 없었을 것이다

지구가 태어나면서 돌고 돌아

서로의 고통 속으로 스며들어 빚어낸 오색 빛깔

다채롭고 찬란한 색들로 채워진 선물 같은 세상

오리라는 상상 너머의 상상을 한다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골목의 노래 - 김사이

 

 

가난이 쉰내 나도록 뭉쳐 버티는 벌집촌

골목 귀퉁이에 나란히 선

전봇대와 가로등

이른 밤 슈퍼도 문을 닫고

귀청을 뜯는 악다구니 소리도 없다

 

흰머리 듬성듬성한 초로의 사내

전봇대와 가로등 사이에 고개를 묻고

구불텅한 등으로 흘러간 노랫가락이 얹혔다

비린내 나는 시간들

낯선 사내의 등이 기록한 오래된 언덕길

 

촉촉이 젖어드는 밤

혀 말려 돌아가는 노랫소리가

길보다 더 내려앉은 지하방까지

꼬불꼬불 가느다랗게 흘러든다

사내에게로 가는 길이 둥글게 휘어진다

떨림도 그리움도 버린

삼류들의 쓸쓸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