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에 출렁이다 - 박경희
툇마루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간간이 못 물결로 우는 소쩍새와
대나무 숲에서 휘청이는
파랑새 떨림이 내 안에 든다
뭉텅이로 앞산을 지나가는 산 그림자
참나무 숲도 무르팍 같은
큰 바위를 쓸고 간다
채반 가득 고사리 말라가고
늘어지게 하품하며 늙어가는
개밥 그릇에
박새가 여러번 왔다 간다
그런데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흙 묻은 고무신 한 켤레 댓돌 위에
앉아 있을 뿐,
다람쥐 자갈 밟는 소리에
넘어지는 햇살만 있을 뿐
어느 날
나는 사람이 아니다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창비
폐염전 - 박경희
눈꺼풀 내려앉은 눈을 비비다가 숟가락이 밥을 놓쳤다
산고랑 볕 짧게 드는 곳에서나
문고리에 걸어둘 법한 휘어진 숟가락
한사코 제대로 넣어보겠다고 이 없는 굴로 퍼 나른다
퉁퉁마다 손가락 붉게 터진 자리 찰방거리며 그려놓은 저승의 지도
소금 창고, 늘어진 젖가슴에 들여놓고 속 끓인 밭 호미질 하고 살았다
가슴속 염전 밭 햇살 솎아내다가 주저앉은 아랫도리
바들거리다 툭, 또 밥을 놓쳤다
집 나간 아들 기다리다가 놓친 밥 한술이 앞산에 길눈으로 허였다
살아도 그만, 가도 그만 그래도 살겠다고 상처투성이 잇몸이
소금 밥알을 모신다
햇살이 파도를 밀어 자글자글 늙어가며 스러지는 곳
앞선 발자국과 뒤따른 발자국 사이의 길 위 결이 부서진다, 염전에
폐선 들어선 지 오래다
*시인의 말
작은 밭을 묵힌 지 7년.
그동안 돌들깨, 도깨비바늘, 왕바랭이, 쇠비름이 자리를 빛냈다.
소소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밭을 일구고 있다.
그 밭에 들어가자 나도 돌들깨, 도깨비바늘이 됐다.
소소한 내가 그 안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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