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조정 시간 - 이성목
그때 세상은 얼마나 지루했을까
할 일 없는 오후가 긴 하품을 하며 옆으로 누워있었다
약간의 떨림과 홍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언제나 채널은 내가 바라보는 반대 방향으로 휙휙 돌려졌다
다 똑같아요 뭐 별거 있겠어요 잡음처럼 지지직거렸으나
무엇이 시작되기 전, 지루한 화면은 계속되었다
어긋나 있는 간격과 중심을 미세하게 다 조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붉고 푸름의 적당한 중간, 검고 흰 간격의
적당한 자리를 잡고 살아봐야 아는 삶이 있다
잘 맞추었다고 기다린 배우의 얼굴이 너무 붉어
다시 푸른색을 찾는 동안 드라마는 막장에 이르기 일쑤다
처음부터 맞추어놓고 살거나 어긋나거나
어떻게든 끝나게 되어있는 것이 있다 끝이 나야만
길고 긴 밤이 본격적으로 드라마틱해지는 것이다
늦게 온 당신도 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잘 맞추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돌려볼 채널도 몇 되지 않는 나였다
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다
*시선집, 세상에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 천년의시작
괘종시계처럼 - 이성목
되돌아오겠다는 맹세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만 가는 시간의 노역자들
정시마다 전생에서 이승으로 나는 태어나고
정각마다 이승에서 더 먼 곳으로 태어나는 나는
언제쯤 당신에게 이를 수 있을까요
몇백만 광년을 돌아서 이제 막 고드름 끝에 도착한 햇살조차도
만나서는 그저 울기만 하는 봄날
한 번은 어깨, 한 번은 무릎
옷깃을 자꾸 스치기만 하는 우리
한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더 가고
가만있으면 한 걸음 덜 가는 곳에서 우두커니 멀어지는 우리
그 사이에서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도 내리는 것이니
굳은 몸의 간격을 좁히지 못합니다
둥근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신이 흔들리는 시계불알을 꽉 쥐어줄 때까지
*시인의 말
어떤 연애의 일
그 어떤 사랑의 일
생의 많은 일들이
'모른다'는 마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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