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복숭아나무 아래 - 이정훈

마루안 2020. 4. 8. 18:55



복숭아나무 아래 - 이정훈



젊어 힘 좋을 땐 밖에 나가 다 떨어먹고

어머니는 복숭아 껍질을 까며 줄창 푸념

아버지야 어머니 입매에다 히물쩍 웃지

젊어 힘 좋을 때와

떨어먹는다는 말의 주객(主客)을 곰곰 흔들어본다

어디서 복숭아 향 솔솔 날아오나

한때는 다 꽃 피던 복숭아나무

가지를 함부로 당기다 먼 데로 떠나던 나그네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숭아 언덕에서 멀지 않던 노정이

꼭 무슨 탓일라고

난 바람의 행적은 있어도

든 바람의 내력까지야 누가 기억하겠나, 한들

나도 한번 떨어먹었으면

복사뼈 깊이 가둬둔 바람을 훔쳐 타고

세상 언덕마다 싸돌며

내 안의 꽃가루를 옮겨주었으면

나무는 혼자 꽃 피우고 열매 맺겠지

늙으니 할멈밖에 없지?

어머니는 말끝에 혼자 웃고

아버지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복숭아만 우물거리고

그럼 나도 한쪽 거들며 속으로 한마디

노형(老兄), 어디까지 가시오?

나그네와 나그네가

나무 밑동에 기대어 복숭아를 나눠 먹는다

가지 끝에 단물 뚝뚝 흘러내린다



*시집, <쏘가리, 호랑이>, 창비








목련 한 대가리 - 이정훈



목장갑은 금방 때 타고 해져 빨간 코팅 장갑이라고 더 정열적인 건 아냐 일용직과 모퉁이 치킨집 사이는 뒤집어도 달라질 게 없는 두께가 문제야 목 긴 청장갑은 이지적으로 보이지만 불보다 뜨겁고 얼음보다 찬 게 이 바닥엔 널렸어 장갑은 흰 장갑이지 목련의 흰빛을 의심할 때 물관의 촉촉함을 생각하게 돼 가끔 눈처럼 흰 장갑들이 가위질하고 기념식수 하고 사라지는 유리문 안쪽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장갑은 결투 신청 같아 꽃잎에 찍은 고무줄 무늬 희미하게 세월 가 구멍 난 곳을 때우러 손금도 가남은 바닥에 코를 박고 눈 녹은 냄새 흥흥, 낡은 수첩에 대가릿수*나 적는 저녁엔 목련이 싫어



*공임 수






# 이정훈 시인은 1967년 강원도 평창 출생으로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쏘가리, 호랑이>가 첫 시집이다. <12+시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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