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중심 - 권혁소

마루안 2020. 4. 8. 18:47



어떤 중심 - 권혁소



읍내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잠시 밖으로 나와

길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는데

자꾸 앞으로 넘어진다

술 탓인가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앉지만

여전히 몸 전체가 왼쪽으로 쏟아진다

몽롱히 살펴보니 왼쪽 다리 하나가 없는 의자,

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니 비로소

다리 네 개의 의자가 된다


왼 다리가 내 몸의 중심이었다니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왼쪽에 대한 편견 - 권혁소



오십 년도 넘게 살았는데 아직

왼손으로 팽이를 깎아 세워보지 못했다


나무를 오를 때도

자전거에서 내릴 때도 오른발이 먼저였다

침 발라 책장을 넘겼으며

중요한 문장에 밋줄을 그었으며

시를 썼으며 반성문을 썼다

모두 오른손이 한 일들이다

왼손잡이에게도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으며

심지어는 왼손잡이가 따라주는 술잔을

불쾌해하기까지 했으니


왼손이 한 일도 있기는 있다

풀을 벨 때 그 모가지를 그러쥐는 일

면도를 할 때 따귀를 팽팽히 잡아당기는 일

넘겨진 책장을 가만 붙들고 있는 일

양치용 컵을 드는 일

아이들 종아리를 때릴 때 바짓가랑이를 잡는 일

그 중 압권은 엉겁결에 거수경례를 올려 부쳤다가

군기 운운,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진 일이겠다


쓰기는 오른쪽을 더 많이 썼는데

망가지기는 왼쪽이 더 빨리 망가졌다

없으면 이내 병신이 되는 몸, 무슨 까닭인지

요즘은 왼쪽으로 누워 자는 것이 훨씬 편하다






# 30대까지 보순지 진본지 경계가 희미했던 나는 갈수록 정치적이다. 유난히 올해는 더 정치적이다. 4월이 되면, 오월이 오면 더 정치적이다. 4월 15일 총선이 있어서 더욱 정치적이다. 누군가 내게 왜 갈수록 정치적으로 변하냐고 물었다. 또 누가 그랬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진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언젠가부터 왼쪽이 더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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