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종이배를 접지 못하여 - 박서영

마루안 2020. 4. 1. 21:43



종이배를 접지 못하여 - 박서영



가령 이런 것이다

몇이 모여 오랜만에 종이배를 접어보지만

한 명도 제대로 접지 못할 때

나는 종이배를 태운 문장들과 함께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창밖의 목련은

아무도 접지 못한 종이배를 접어 나비를 태운다

아무도 종이배를 접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날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내 왼쪽은 늘 아득한 곳

최근에 나와 가장 가까웠던 슬픔이 고여 있다

입술을 빠져나간 헛된 질문이 밤의 밀거래를 완성한다


나는 하늘을 물들일 나의 부피를 알고 있다

그것은 매우 작고 작은 하늘의 땅이어서

아무도 잃어버린 줄도 모를 것이다

문장이 낯익어, 간밤에 내가 쓴 것일까!

즉, 우리가 어느 해 그 해변에 있었다는 것인데

두근거리는 파도와 함께 그곳에 숨었다는 것인데


추억을 지키는 그따위 일에 누가 목숨을 걸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나무에 핀 하얗고 작은 종이배들이

우리가 함께 갔던 해변에서 밀려온 것이라 믿는다

목숨을 걸고 추억이 밀려온 것이라 믿는다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버스 정류소에 앉아 있는 셋 - 박서영



어느 날부턴가 우리는 일제히 촛불을 들고

밤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확실한 신념을 갖고 걷는 자도 있었고

얼떨결에 무리 속에 섞인 자도 있었다

나도 촛불을 들고 서 있긴 했지만

소망하는 건 달랐고, 달과 태양에 가위표를 치며

추억이 많은 마을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

최대한 멀리 떠나야 했다


시골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 셋

다 같이 꽃무늬 몸빼 바지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뽀글뽀글 파마머리

꼭 촛불 같았다

역시 소망하는 건 달랐고,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버스가 오는지, 당신이 오는지, 먼지 속을

달려오는 도형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다른 건 다 가위표를 쳐도

사람에게는 가위표를 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한 건 최대한 추억과 멀어지는 일이었다

순간들이 순간, 순간, 순간으로 지나갈 때도

꽃이 피고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정말이지, 먼 곳의 여관방에서 덮는

시간의 이불은 꽃과 나비처럼 아름다운 거여서

생애의 추억은 다 따라와 흩날렸다

나는 낯선 곳에서 늙었거나 혹사당했다

잊게 해달라고 혼자 욕도 해보았다, 정말이지

지금 생에서 먼 곳은 어디란 말인가

먼 곳을 찾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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