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양파 - 김이하
햇살이 들다
고개를 꺾고 기웃거리는 창가에
한 알 남은 사과는 한 달도 넘게 뒹굴거리던 것이고
두 알이 남은 양파는 한 달이 못 된 것이다
국을 끓이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혹은 생으로 먹어치울 식욕도 없이 그렇게
내 삷은 흘러왔던 것이다
사실 그것들이 검정 비닐 봉지에 담겨
삼층으로 마지못해 올라올 때도
뚜렷한 목적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이들은 그 창가에 놓였고
햇살이 애를 닳고 목을 꺾게 한, 오히려 그들의 생존이
더 간절하게 똬리를 튼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 간절한 시간들
언덕배기를 오르던 아버지의 굵은 종아리 스러지고
한꺼번에 허물어지던 어머니의 무릎
애인에게서 퐁겨 오던 그 단내 나는 시간들마저
의지가지없던 긴 세월
그러나 삶은 또 한 번 온다
간절한 가슴팍에서, 저 깊은 울음의 늪에서
사라진 아버지의 종아리 틈에서, 어머니의 꺾인 무릎에서
늙어 버린 애인의 시간은 지나가고
살아야 할 삶은 바동거리며 남는다
햇살이 시다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울컥 - 김이하
아프다, 오래오래
가슴 깊은 곳에서 시고 쓰린
오물이 넘어오고
생선보다 더 비린
피 냄새가 난다
이 땅에 살다가
몹쓸 짓에 휩쓸려 죽어 간 사람들
하나하나 이름 다 부를 수 없는
내 어수선한 머릿속으로
사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는
울컥, 눈물을 길어올린다
마르지 않는 지하수처럼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끌어올리는
울컥이라는 마중물
피할 수 없는 그것, 그래서 사람이라는
곤혹(困惑)
문득 버스 창에 얼비친
한 그림자 쓸쓸할 때
와락, 안아 주고 싶은 사내의 등
버스에서 내려 보면 그 차창엔
멍한 내 눈동자만 박혀 있다
*시인의 말
벽에 기댄 풀 그림자--
한 줌도 안 될 흙부스러기 틈에 뿌리박고
바람받이에 온몸 휘청거리는 저곳
나는 어쩌자고 이 길로,
비루한 외길로 슬쩍 빠져 버렸던가
그러나 어쩌랴, 이제 갑자(甲子) 돌았으니
타박타박 걸어온, 이 나선형 궤적을 돌아
또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저 벽에 기대어
스스로 미움을 삭이면서, 빛을 새긴다
햇살이 잠시 드리워 주던 그림자
희미한 내 모습을 새긴다
또 어쩌자고 강퍅한 벽에
맨몸 하나 걸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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