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슬이 맺히는 사람 - 정호승

마루안 2020. 3. 31. 21:52



이슬이 맺히는 사람 - 정호승 



다행이다

내 가슴에 한이 맺히는 게 아니라

이슬이 맺혀서 다행이다


해가 지고 나면

가슴에 분을 품지 말라는

당신의 말씀을 늘 잊지 않았지만


언제나 해는 지지 않아

가슴에 분을 품은 채 가을이 오고

결국 잠도 자지도 못하고

새벽길을 걸을 때 


감사하다

내 가슴에 분이 맺히는게 아니라

이슬이 맺혀서 감사하다

나는 이슬이 맺히는 사람이다



*시집, 당신을 찾아서, 창비








슬프고 기쁜 - 정호승



꽃이 저 혼자 일찍 피었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꽃이 저 먼저 져버렸다고 봄날이 아주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저 혼자 걸어간다고 새로운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길이 다 무너졌다고 길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비가 와서 길은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탕 길을 걷는 내 발자국마다 그래도 꽃은 피었다


오늘은 선암사 고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다가 나를 바라본다

매화 향기에 취한 새들이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나를 바라본다


작은 새의 슬프고 기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사랑한다

새의 눈빛을 지니지 못한 당신도 사랑하다가 영원히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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