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찍 일어난 새 - 이학성

마루안 2020. 3. 30. 19:20

 

 

일찍 일어난 새 - 이학성


아비께서 강조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되어라.
그것 하나만 지켜도 생을 지킬 수 있으리.
그러곤 덧붙였다.
책상을 바르게 정돈하라.
그것이 어지러워선 안 된다.
그것 하나만 실천해도 모두가 반듯한 사람으로 기억하리.
귀에 못 박힌 이야기.
말씀은 그뿐이었지만 소년은 믿음이 부족했다.
그것의 일 푼조차 새기지 못했다.
때는 늦었다. 책상은 어질러졌고
늦도록 먼 땅을 떠돌고 있다.
눈물이 그칠 새 없다.
여전히 울고 있는 소년,
어떻게 해도 그를 달랠 길 없다.
그러니 내 안에서 울도록 계속 놔둘 참이다.


*시집, 늙은 낙타의 일과, 시와반시

 

 




노안(老眼) - 이학성


그가 바뀐 건 다른 인과로 보긴 어렵다. 단지 세월이 부친 경이로운 힘을 받았을 뿐, 그걸 붙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던가. 조급함을 내려놓고서 그는 상냥한 사람이 되었다. 성마름이 달아나자 차분하고 친절해졌다. 그로써 분노와 격한 표정을 얼굴에서 잃었지만, 정감과 온기를 이마의 주름처럼 얹었다. 그러니 함부로 재촉하며 까탈 부릴 일이 있는가. 의심과 해찰로 두리번거리는 기회가 줄어들더니 온갖 물음으로 가득한 아홉 살 소년의 눈이 찾아왔다. 이제 그것으로 그는 세상을 더듬으려 한다. 돋보기 앞의 흐릿한 세계, 눈길 닿는 구석마다 다가오는 느림과 서툶! 비로소 그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그는 기꺼워한다. 늦었으랴, 어두워가는 노을의 최후가 붉고 아름다운 이유가 그것인데.



 

# 이학성 시인은 1961년 경기 안양 출생으로 199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여우를 살리기 위해>, <고요를 잃을 수 없어>, <늙은 낙타의 일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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