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밑에 서서 - 김종해

마루안 2019. 12. 30. 19:55



세밑에 서서 - 김종해



북한산이 조금 내려와 있는 저녁
불광동 연신내 어귀에서
우리는 양평해장국을 먹었다
북한산의 산빛보다는 어려보이는
불빛 세월 산수(傘壽)의 나이
아내와 함께 양평해장국을 먹었다
국물은 세밑의 우리를 따스하게 한다
하루 지나면 새해가 되는 섣달의 끝
이른 저녁 켜지는 불빛 속에서
연신내는 발밑에서 물소리를 감추고 있었지만
나는 세상의 소음을 다 듣고 있다
불빛이 보이는 곳엔 사람이 산다
무심한 듯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같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어둠이 보인다
알 수 없는 그 어둠 속에서
바다 찾아가는 작은 시냇물 소리를
나는 연신내에서 듣고 있다
이제 어둠이 끝나면
누구에게나 새해가 찾아들리라
가는 사람 가고, 오는 사람은
또 다시 막힌 세상의 어둠과 맞서리라
연신내의 물소리도 듣는 자의 것이리라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 문학세계사








늦저녁의 버스킹 - 김종해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
내 몸속에 악기(樂器)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간 소리 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
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
나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
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
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
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꾼다
오늘밤 이곳이면 적당하다
이 거리에 자리를 펴리라
나뭇잎 떨어지고 해지는 저녁
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
어둠 속의 비애여
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
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리라
사랑과 안식과 희망의 한때
나그네의 한철 시름도 담아보리라
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
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
오늘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






# 김종해 시인은 1941년 부산 출생으로 1963년 <자유문학>과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인간의 악기>, <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 <천노, 일어서다>, <항해일지>,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별똥별>, <풀>, <봄꿈을 꾸며>, <눈송이는 나의 角을 지운다>, <모두 허공이야>, <늦저녁의 버스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