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들 위에 - 백무산
한 해가 또 저물어가는 이런 밤들은
공연히 고요하고 거룩하다
하긴 소멸하는 것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으로
살아 있는 모든 목숨이 깊어져 가는 이런 밤이
어찌 거룩하지 않을까 눈마저 내리는 밤
잠 못 들어 깊은 밤 나는 새로 사온 수첩에
삼 년이나 닳아 너덜너덜해진 수첩 속
이름들 하나하나 옮겨 적는다
내게 와서 저물어가는 것들이 서글퍼진다
한땐 다정했던 이름 위에 줄을 긋는다
내 잘못 살아서 잃어버린 이름들 위에도
기다리다 지쳐버리고 떠난 이름들 위에도
세상 무거운 짐 지고 젊음 다 바친 사람
지난 여름 영구차로 바래다준 이름 위에도
차마 줄을 긋는다
눈물로 떠난 이름들 가슴 치며 가버린 사람들
그 상처들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 이름들 위에도 속죄하듯이 줄을 긋는다
그 이름들 위에 밤이 내리고 눈이 내린다
돌아보면 한 생이 이리 허망해
뜨거운 눈물로 안아보기도 전에
돌아서서 저만큼 찬바람 분다
어둠에 돌아가는 길모퉁이
눈이 내려 다 지우는데
나에게 와서 저물어가는
모든 이름들 위에 눈이 내린다
내 이름 위에도
*시집, 초심, 실천문학사
12월 - 백무산
늦가을 남은 잎새마저 가져가느라고
바람엔 가시가 돋았습니다
길섶 마른 풀들은 손을 흔들고
들은 저 낮게 흐르는 가을강을 따라
한 생의 시간들을 흘려 보내며 여위어갑니다
그들이 외로워 보여 손을 내밀어보지만
내 존재의 경계는 자꾸 허물어져
시간의 상처만 손바닥에 바스락거립니다
나에게도 그만큼의 시간이 빠져나가
내 몸에서도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잡았던 손이 풀리고 그곳엔 허공이 채워집니다
그럴수록 나는 안간힘을 다해 그대를 떠올립니다
자꾸 그대 따뜻한 이름을 불러봅니다
뜨거웠던 날들은
몸이 미치는 곳까지가 나 자신이더니
11월엔
사랑이 미치는 곳까지가 나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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