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이름들 위에 - 백무산

마루안 2019. 12. 29. 19:20



그 이름들 위에 - 백무산



한 해가 또 저물어가는 이런 밤들은

공연히 고요하고 거룩하다

하긴 소멸하는 것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으로

살아 있는 모든 목숨이 깊어져 가는 이런 밤이

어찌 거룩하지 않을까 눈마저 내리는 밤


잠 못 들어 깊은 밤 나는 새로 사온 수첩에

삼 년이나 닳아 너덜너덜해진 수첩 속

이름들 하나하나 옮겨 적는다

내게 와서 저물어가는 것들이 서글퍼진다


한땐 다정했던 이름 위에 줄을 긋는다

내 잘못 살아서 잃어버린 이름들 위에도

기다리다 지쳐버리고 떠난 이름들 위에도

세상 무거운 짐 지고 젊음 다 바친 사람

지난 여름 영구차로 바래다준 이름 위에도

차마 줄을 긋는다

눈물로 떠난 이름들 가슴 치며 가버린 사람들

그 상처들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 이름들 위에도 속죄하듯이 줄을 긋는다


그 이름들 위에 밤이 내리고 눈이 내린다

돌아보면 한 생이 이리 허망해

뜨거운 눈물로 안아보기도 전에

돌아서서 저만큼 찬바람 분다

어둠에 돌아가는 길모퉁이

눈이 내려 다 지우는데

나에게 와서 저물어가는

모든 이름들 위에 눈이 내린다

내 이름 위에도



*시집, 초심, 실천문학사








12월 - 백무산



늦가을 남은 잎새마저 가져가느라고

바람엔 가시가 돋았습니다


길섶 마른 풀들은 손을 흔들고

들은 저 낮게 흐르는 가을강을 따라

한 생의 시간들을 흘려 보내며 여위어갑니다

그들이 외로워 보여 손을 내밀어보지만

내 존재의 경계는 자꾸 허물어져

시간의 상처만 손바닥에 바스락거립니다


나에게도 그만큼의 시간이 빠져나가

내 몸에서도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잡았던 손이 풀리고 그곳엔 허공이 채워집니다

그럴수록 나는 안간힘을 다해 그대를 떠올립니다

자꾸 그대 따뜻한 이름을 불러봅니다


뜨거웠던 날들은

몸이 미치는 곳까지가 나 자신이더니

11월엔

사랑이 미치는 곳까지가 나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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