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옛사랑, 서울역 광장에서 - 이성목

마루안 2019. 12. 29. 19:38



옛사랑, 서울역 광장에서 - 이성목



별이 되려다가 실패한 인생들이 별을 보며 병나발을 불었다

환속에 실패한 그림자가 지하도 계단에 앉아 등을 구부렸다

세상의 호명을 기다리던 자판기 속

분내 나는 화장지 한 겹 한 겹 광장 모퉁이로 모여들었다

말의 단맛을 본 공중전화는 어떤 시대와도 소통되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저쪽의 부재를 알리는

단속음이 오래 들려왔다 야음을 틈타 상경했던 완행열차 쇳소리 같은

추억이 잠시 서울에 세 들어 살다가, 서울이 되려다가

실패한 신도시와 함께 총알택시를 타고 떠나고 있었다

한때 너도 세상의 성모가 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중년의

여자는 80년대식 가투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번만

우리 다시 피비린내 나는 섹스를 즐기지 않겠냐고 가끔은

옛날이 그립기도 했었다고 쪼그라든 젖꼭지에 담뱃불을 비볐다

몸에 불꽃이 일던 새벽, 공중변소에 오줌을 질질 흘려놓고 나는

옛사랑 버렸다 버린 놈에게 무슨 놈의 인생이 있겠냐고 진저리 치며

미화원들이 리어카마다 깨진 불알을 소복하게 쓸어 담았다

서울의 일박이 실패한 사랑을 싣고 어디론지 떠나고

집 나온 똥개 한 마리 미명을 가로질러

넥타이를 질질 끌며 광장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시선집, 세상에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 천년의시작








옛사랑, 포도밭에서 - 이성목



옛사랑 여자와 마주 앉아 포도를 먹는다

껍질을 벗겨 내며 한낮 뜨거웠던 알몸을 추억하는 동안

지나간 세월의 껍질이 소복하게 쌓인다

다시는 버리지 않으려고 움켜쥐었던 손바닥으로

달게 흘린 옛 시절의 눈물이 흐른다

삶이 가끔은 이럴 때가 있다

움켜쥐면 쥘수록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포도의

알맹이처럼, 껍질처럼 제각각 버려질 때가 있다

이제 와서, 버렸던 옛사랑의 굵은 눈망울과

식탐을 앞세워 마주 앉는 쓸쓸함이여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포도알처럼 훌러덩 벗겨지는

그의 검게 젖은 눈동자 속, 아직도 보인다

나는 나의 껍질을 잡고 더 오래 버틸 수 없어

옛사랑 떠난 적 있다, 포도 알맹이처럼

모든 아픈 육신을 황홀하게 뭉개어줄

세상의 혓바닥으로 순순히 들어섰던 적이 있다

어떤 약속, 어느 넝쿨손에 깍지를 끼어야 하는지

어느 바닥에 내뱉어지는 껍질이 되는지 알지 못하고

옛사랑 버린 적이 있다, 사무침이여

지금은 시간이 발끝에 소복하게 쌓이는 오후

늙은 옛사랑 여자의 음부처럼 너덜해진

포도 껍질, 쓸어 담는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는다






# 시인이 새 시집을 낸 지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이 시집 소식을 들었다. 늦바람 불어 무슨 열성인가 싶어 잽싸게 구입했다. 시집 나오면 무조건 사서 읽는 시인이라서 실물 보지 않고 주문했는데 시집을 펼치자 낯익은 시가 대부분이다. 이전 시집에 실린 시를 추려서 다시 묶은 시선집이다. 몇 군데 손질한 시도 있고 대폭적인 쳐내기와 改漆로 인해 사랑시의 완성도를 높인 시도 있다. 아픔이 담긴 옛사랑에 대한 아련함 때문일까. 지나쳤던 시가 여러 번 읽게 만든다. 사랑, 일단 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