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분의 사랑 - 배영옥

마루안 2019. 12. 28. 19:39



여분의 사랑 - 배영옥



나의 미소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백날을 함께 살고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세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아뿔싸,
나는 벌써 죄인이었구나
한 사람에게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어쩌랴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다음에 - 배영옥



슬쩍 가슴 한쪽 보여주고
황급히 옷깃을 사리는 말이 있다


온전한 정신도 낯선 치매도
노구(老軀)에 갇혀버렸다
누구도 따라 들어가지 못하는 검은 내부,
흰 머리칼이
허공을 향해 휘어지고 있었다


작은 교회 요양원이었다
백발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지막 씨앗까지 날려보낸 빈 대궁들
표정조차 닮아가는 의좋은 자매들


백주대낮에 긴 어둠 고여, 출렁이는 섬 같다
정신이 몸을 가두고
몸이 정신을 가두는
저, 아득한 섬과 섬 사이


몸밖으로 흘러나온 시간들
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잃는 것이 많아질까


그녀가 본 것은 늘 나와 함께 있다
아무것도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하고 돌아서는데
너무 많은 다음에 치인 다음이
손사래를 친다
다음이 다음을 기다리는 줄 모르고
기다리는 다음이
영영 세상을 등지는 줄도 모르고
다음에, 다음에 올게요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이름들 위에 - 백무산  (0) 2019.12.29
슬픔이 오는 방식 - 김말화  (0) 2019.12.29
겨울 골목 빵집 앞 - 서광일  (0) 2019.12.28
단지 짐작만으로 - 강회진  (0) 2019.12.28
검은 항로 - 전윤호  (0) 2019.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