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 골목 빵집 앞 - 서광일

마루안 2019. 12. 28. 19:29



겨울 골목 빵집 앞 - 서광일



건물 주인은 세를 올리는 대신 딸 핑계를 댔다
봄이면 골목을 서성이던 빵 냄새도 떠나야 한다


막 속살 오른 빵이 뾰로통한 아이 볼 같다
누군가는 봉지처럼 버려지고 누군가는 밟는다


바람이 냄새를 반죽하는 동안 봉지가 굴러간다
무겁게 가방을 맨 아이들이 골목으로 달린다


한 줌씩 떼어 낸 걱정이 부풀어 오른다
배고픔의 모양들 종류별로 진열해 있다


어둠이 도시를 숙성시키는 동안 공사는 계속된다
갓 구운 빵 둥근 모서리만 아이처럼 들썩거린다


사거리에 또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섰다
반죽을 빚던 사내가 모자를 한참 고쳐 쓴다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출판








드림고시원 301 - 서광일



허리가 또 쑤신다
꿉꿉한 냄새가 맴도는 것 같아
겨드랑이 쪽에 코를 대본다
달팽이처럼 통증을 말아
온몸을 감쌀 수 있다면
하지만 하루란 건
가슴을 얼마나 펴느냐에 달렸다


쭈그려 신발을 신는 동안
305호쯤에서 알람이 울린다
뒤꿈치를 추키며 복도를 나왔는데
알람 하나를 더 울린다
일주일만 쉬겠다고 사장에게 말을 꺼내려다
해진 소매 끝처럼 웃기만 했다
새로 누굴 구하는 건 일도 아니다


석 달씩이나 월금이 밀려도
사장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웃음을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사장은 뜬금없이
국가 대표 축구 경기 얘기다
법적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내는 세차장에서 그래도
사장이 가장 신뢰하는 구역 책임자다
통증을 이겨 내는 유일한 비결이다
지하철은 비좁아 자꾸만 허리를 뒤틀리는데
두고 온 전화기가 갑자기 떠오른다
욕이 치밀고 부재중 독촉에 시달려도
아직은 고용 중이니까






# 위의 두 시는 연과 행에 의미를 두고 읽어야 한다. 두 줄씩 여섯 연의 첫 번째 시는 대기업에 밀려난 중소 상인의 애환이 느껴진다. 일곱 줄씩 네 연으로 된 두 번째 시 제목은 왜 드림고시원인가. 낮은 데를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하고 고운 심성이 올곧이 전해온다. 들뜨기 쉬운 연말에 이런 시를 읽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런 것이 좋은 시의 힘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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