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지 짐작만으로 - 강회진

마루안 2019. 12. 28. 19:23



단지 짐작만으로 - 강회진



추억도 낡아간다 우연히
생각하지 않는 순간 추억은 접혀진다
이십 년 만에 연락이 닿은 그는 나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기차역이 떠오른다고 했다
기차역을 지나칠 때마다
혹은 텔레비전에 기차역이 나올 때면
나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늘 어디론가 떠나는 뒷모습만 봐서 그런 건가 싶어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했다 한다
그간 몇 번의 기차역을 지나쳤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기차역에 서 있는 나의 뒷모습을 그려보다가
나는 너무나 쓸쓸해져서 가만히 두 팔로 어깨를 감쌌다
울컥, 눈물이 나오는 것도 같았다
그동안 서로를 찾지 않은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모른 척 한 세상 건너갈 수도 있었을 텐데
다시 연락이 닿은 것 또한 궁금하지 않았다
낡고 접힌 추억은 때로 짐작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잘 살고 있느냐 세월 참 많이 흘렀다 그리고 침묵,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기약할 수 없는 만남을 기약하는 것은
깊은 밤 창밖 홀로 선 나무의
차가운 기침 소리를 듣는 일처럼
단지 짐작만으로 가능한 것



*시집, <반하다, 홀딱>, 출판사 장롱








밤의 조각들 - 강회진



바람은 허름한 문을 타고
잠 못 드는 내 몸 한 바퀴 휘돌아 나간다
겨울, 초원에 부는 바람조차 얼어있다
마지막 촛불도 낮게 엎드려 흐느끼는 밤
눈 떨어지는 자작나무 숲
거꾸로 매달린 붉은 눈물들
마음의 파벽(破壁)을 통과하는
너의 것인 동시에 나의 것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적막하게 달려와 또 먼 길을 끌고 가는 어둠
소리 없이 흩어지는 밤의 조각들
노래 소리 그친 초원을 떠돌다가
그대 얼굴 한 번 쓰다듬은 인연으로
바람이 쌓여가는 밤, 나는
일렁이는 그림자로 서성이고
얼굴 한 번 스친 인연으로
그대 또한 뜬눈으로 밤의 조각들을 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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