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왼손에 대한 보고서 - 한관식

마루안 2019. 12. 28. 18:13

 

 

왼손에 대한 보고서 (하나) - 한관식

 

 

진눈깨비 오는 어느 날 

가위질 소리 잘강잘강 마을 안에 부려놓고

목에 걸친 끈이 지탱하는 엿판을 가슴께에 얹어

어깨춤까지 합세하면 그대로 광대더라

개똥이 짱구 칠칠이 오줌싸개 죄다 불러 모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엿판이 바닥을 보일 때

피맺힌 절규를 쏟아낸다 -내 다리 내놔라!

그때 엿장수 한쪽 다리는 의족이더라

 

빗살무늬 유리로 된 욕실 안으로 나를 접는다 

그녀를 모텔로 기막히게 데려오기까지 

한 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 혹시 사탕발림이 

안 먹히지 않을까 다각도의 노하우로

방문 손잡이를 돌릴 그 순간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잠깐, 방심한 나를 욕실 문 그림자로 본

그녀는 기겁을 해 소리친다 -어머나, 가짜 팔이네!

그때 나의 한쪽 팔은 의수더라

 

 

*시집, 밖은 솔깃한 오후더라, 보민출판사

 

 

 

 

 

 

왼손에 대한 보고서 (여섯) - 한관식

 

 

짐작은 했겠지만

잡으면 잡히지 않고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는

장애의 증후를

지금도 끊임없이 되묻는 행방과

안팎에서 벌어지는 낌새의 소스라치는 현실

머리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균열된 채

쩍쩍 갈라지는 틈 사이로 파지들이 쌓이고

설득하고픈 오른손은 새로운 세상과 접속을 시도한다

 

짐작은 했겠지만

현명한 결별의 시기를 택하기 위해 이정표도 없는

마을로 스며들어가 겨울 어디쯤에서 가방을 부려 놓는다

살찐 달 하나 산골의 밤을 도왔나

신문지 벽지가 더께한 아랫목에

메주는 익어가고 수상쩍은 곰팡이를 털어내자

희망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바람은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 한관식 시인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2007년 <시사문단>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껴가는 역에서>, <밖은 솔깃한 오후더라>가 있다. 5년 전 사고로 왼손을 잃고 얇은 옷 속에서 떨고 있는 자신에게 문학을 선물했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아름다운 생과 타협하며 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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