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레국화가 그려진 집 - 정영

마루안 2019. 12. 27. 19:24



수레국화가 그려진 집 - 정영



말라비틀어진 국화 봉오리 손으로 비벼보면
죽어서도 그윽한 향내가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 안다지


바람이 허공에 지은 집의 뼈대만을 남기고
사바세계를 가만가만 어루만질 때
나는 나를 허공에 담가 뼈만 건져내어
저 나뭇가지 위에 사원을 지을까 허몽을 꾸어보지만
내처 도리 없는 일이란 걸 아니


내 연민의 노래를 크게 부르며
우주의 모퉁이를 끝없이 달리는 거지


문득 마주친 먼지를 밀고 들어가면
지친 잠을 깨우듯
누군가 물어오는 안부


이번 생은
황량한 들판에 물끄러미 선 패장처럼
갑옷을 벗지도 못하고 칼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먹자니 먹기도 울자니 울기도 그런 것인가 봅니다


전생에 숨어 다음 생이나 기다리며



*정영 시집, 화류, 문학과지성








비망증명(備忘證明) 2 - 정영



탄성 없는 영혼이라


누가 나를 버리려 할 때도
당신 뒷모습이 쓸쓸했을 때도
그냥 서 있었지
새벽 정류장에 서면 환하게 밝아지는 고독


지난밤의 사람들이 옅은 맥박처럼 흔들리다
시름한 입김도 없이 사라지면
내가 하려다 만 말들만 식은 밥처럼 놓여 있었지


눈을 감고 서로의 얼굴을 만져보자고 했던가


모든 약속들은 철로변의 풀처럼 뒤엉켰고
난 목이 꺾여도 상관없는 풀처럼
지나가는 기차에게 팔다리를 내주어도 상관없어
그러니 울 것도 없었지


사진관 앞을 지날 땐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치면 되니까
더 울 것도 없겠지


때때로 달력과 시계를 보고
이발과 박음질을 반복하며 몸을 꾸준히 말며
과거를 망각하는 기술을 습득했으니
더 후회할 것도 없지


앞으로도 서로의 몸을 씻겨줄 일 없으니
고마워할 일도 미안해할 일도 없어
그냥 서 있지


눈을 감고 서로의 우는 얼굴을 좀 만져보자고 했던가
누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은 항로 - 전윤호  (0) 2019.12.28
왼손에 대한 보고서 - 한관식  (0) 2019.12.28
당신의 북쪽 - 전형철  (0) 2019.12.26
어둠이 따뜻하다 - 권천학  (0) 2019.12.26
위하여 - 박일환  (0) 2019.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