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람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 황원교
새 한 마리 나뭇가지 끝에 앉았다 날아가듯이
누군가는 남고 또 누군가는 떠나가야 한다
새의 발 구름과 도약으로 나무는 잠깐 흔들리며
훌쩍 날아간 새를 잠시 생각하는 듯하지만
이내 멈추어 가뭇없이 잊어버린다
살고 죽는 게 이와 같아서
머무는 것도 떠나는 것도 한순간이라고
저녁 바람이 텅 빈 나무를 쓰다듬는 동안
나무는 안으로부터 시나브로 어둑해지며
코끼리 귀와 같은 게 그늘을 펄럭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날아간 새의 온기와 흔듦이 나무의 심장을 뛰게 했고
나뭇가지들을 더욱 낭창낭창하게 했으며
땅속 깊이 뿌리 내리게 한 것임을.....
비로소 나무는 하늘을 우러러
천수관음상의 손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은 가지들을 하나로 모아
간절한 기도와 깊은 명상에 들어간다
새 한 마리 나뭇가지 끝에 앉았다 날아가듯이
나무가 조금 전 날아간 새를 까마득히 잊어버리듯
어찌 너와 내가 서로를 쉬이 잊을 수 있을까
사람이어서 우리,
정말 다행이다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이순(耳順) - 황원교
지은 죄가 하도 크고 무거워서
생애 절반을 휘청거리며 걸어 왔고
나머지 반은 누워서 목숨을 부지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가을 단풍처럼 온몸으로 타올라서
끝끝내 버리고 내려놓는 일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하여
쉼 없이 꿈꾸었노라
다시 일어나서 걷는 꿈을
힘겹게 고갯마루에 올아서 보니
눈앞에는 가파른
내리막길
차마 기어서 갈 수조차 없는 길이지만
밤하늘의 별을 다 헤아릴 때까지 걸어가
노을 지는 바닷가 솔숲에서 잠들고 싶다
그러나
단풍처럼 애써 아름다이 물들려고는 하지 말자
그것 또한 집착일 테니
# 황원교 시인은 1959년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와 계간 <문학마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빈집 지키기>. <혼자 있는 시간>, <오래된 신발>, <꿈꾸는 중심>이 있다. 제3회 청선창작지원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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