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펌프 - 장문석

마루안 2019. 12. 17. 22:50



펌프 - 장문석



그쯤이었다
고철 가게 아저씨가 명함 한 장 주고 간 것은


펌프의 손잡이는 꼭 말의 잔등을 닮았다


젊은 한때,
나침반과 컴퍼스, 그리고 지도 한 장 짊어지고는
어디쯤인가, 황홀한 오르가슴의 수맥은
불볕 사막 종횡하며
밤마다 좌표를 고쳐 찍던
뜨거운 몽정의 시절이 있었는데


박차(拍車)는 언제나 수맥과 어긋나고


그리하여 지금,
어느 별자리를 헤매고 있는가
붉은 쇠 비듬 뚝뚝 떨구며
어느 모래 언덕을 넘고 있는가
잔등의 갈기는 비루먹었고
삭신 또한 낡고 녹슬었다


어쩔까,
내일은 네거리 술청에 나가 앉아 늦도록 흥정이나 해볼까


아직은,
새벽이슬 마중 삼아
쿨럭쿨럭 파열음 몇 토막은 토해내는



*시집, 내 사랑 도미니카, 천년의시작








문상 - 장문석



그는 평생 벼랑에 붙어살았다
가끔은 벼랑과 벼랑 사이를 건너뛰기도 했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깨진 손발톱에선 언제나 피가 흘렀다


그는 한사코 오르려 했다
그만큼의 높이마다 젖과 꿀의 때깔이 달랐다
추락의 경고는 애써 듣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그가 검은 띠 고깔을 쓰게 된 이유였다
마치 우주선의 대가리 같다


스스로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이젠, 더 이상의 추락이 없는
아득한 우주, 그 너머로 날아갈 수 있겠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 잘 가라
삼가 두 번 절하고 나오는데
뒷덜미가 뜨끔하다


웬일인가, 흘끗 돌아보니
이런 조홧속이 있나, 거기
검은 띠 고깔을 쓴 사내가
다름 아닌 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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