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 발자국 화석 - 박서영

마루안 2019. 12. 16. 19:49



새 발자국 화석 - 박서영



바위 속으로 누군가 떨어진 흔적

나는 울부짖는 맨발을 떠올린다

발자국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단단해지고 있다

날아가기 위하여 먼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어린 새였을까

날다가 지쳐서 잠시 지상에 내린

늙은 새였을까

움푹 들어간 발자국 안에 내 발을 넣어본다

천천히 사막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풀밭 속에 감춰진 바위에

사랑의 파동이 남긴 흔적이 뻗어 있다

저 발자국은 날아가면서 남긴 것일까

지상에 안착하며 남긴 것일까

백만 송이 구름의 몸이 찢어지고

펑펑 첫눈 내린 날에

쑥스러운 듯 열렸다가 닫히는 발자국 하나

나는 불타오르는 맨발을 떠올린다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천년의시작

 







중이염 - 박서영



마산 창동 버스 정류소에서

귀에 자물쇠가 채워진 광고지를 보았다

코끼리 귀처럼 커다란 귀에

귀고리처럼 매달린 은빛 자물쇠 하나

쉬지 않고 무수한 소문들이 들락날락했으니

거미가 줄을 칠 겨를이 없었겠지

속은 얼마나 고름을 쟁여놓고 상처를 쌓아두었을까

그것이 이제 터진 것이라고

방죽이 터진 것이라고

둥글게 말려 올라간 귓바퀴를 만지며 생각했다


사람이 떠난 빈집은 자연의 집으로 돌아간다

대문 앞에, 방문 앞에 거미가 집을 짓고

마당은 망초꽃과 쥐와 고양이와

나비와 새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을

폐가의 대문에 뚫린 구멍으로 들여다봤을 때처럼


귀의 문에도 자물쇠를 달아놓는다면

내 귀도 자연의 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아, 험담은 돌고 돌아서

다시 내게 날카로운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몸속에서 사랑보다 미움이 더 빨리 걸어나가니

사랑해 볼 막간이 없으니

내 귀와 입술이 그만 부음(訃音)에 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