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보는 네가 나를 보고 있다면 - 고영민

마루안 2019. 12. 17. 22:25



내가 보는 네가 나를 보고 있다면 - 고영민



시간은 색을 갖고 싶어
잎새에 들었다
늙고 싶어 얼굴에 들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일어나라는 사람
밥 먹으라는 사람 없는

무얼 잊고 싶어
시간은 아무 슬퍼하는 이 없는 죽음에 들었나

마음을 쫓는 몸처럼
몸을 쫓는
그림자처럼

더 멀리, 더 힘겹게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는

한참 동안 내가 보는 네가 나를 보고 있다면
그건 아주 오래전
끝내 몰랐던 얼굴

화사한 꽃잎 뒤의 가득한 질문들처럼
도로 위에 떨어져 잔뜩 으깨진
노란 열매들처럼



*시집, 봄의 정치, 창비








저녁으로 - 고영민



누가 올 것만 같다
어두워져가는 저 길 끝
누가 올 것만 같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어설 수 없다
가버리면 영영 후회할 누가 올 것만 같다
청미래덩굴 너머
길을 조금씩 지워지고
뭉개지고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는 오고
손짓하고
소리치고


지워지고 있다
기다리는 내가 지워지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기다린 내가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게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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