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둥글다는 거 - 이명우

마루안 2019. 12. 18. 22:29

 

 

둥글다는 거 - 이명우


바람과 햇빛과 달빛과 공기들이 유목민처럼 모여 살다 떠난 곳
그는 보름 동안 오지 않았다

외진 농장에서 고요가 능선으로 울타리를 치고 있을 때
개밥그릇에 담긴 햇빛을 그림자가 먹고 있을 때
말뚝에 박힌 개의 목줄은 끝없이 태엽을 감고 있었다

산이 컹컹 울었고 달빛이 개밥그릇에 담겼다
구름은 둥근달을 갈아먹었고
울음소리에 달빛이 어두워져 갔다
개의 혓바닥은 죽음을 닦았고
산도 그림자를 마주 잡고 어둠을 넘고 넘었다

허기가 위장을 간지럽게 긁어대면
혓바닥에 걸린 기다림은 늘어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긴 기다림의 혓바닥을 붙잡지 않았다

목줄에 걸린 햇빛이 그 끈을 놓지 않고 그 풍경을 가득 채웠다
둥글게 돌아다니는 시간은 목줄을 잡아당겼고
바람 앞에 무릎이 풀리고 있었다

죽음이 먼지처럼 달라붙는 중환자실
간성혼수로 쓰러진 그의 배에서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햇빛이 어둠을 닦고 있을 때
억만 배를 올렸던 그릇이 번쩍거리면서
그의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 애지


 

 

 

 

그늘 - 이명우


겨울바람에도 여름의 긴 혓바닥이 걸려 있다

찢어진 코팅장갑
누가 저 땀들을 소복하게 걸어놓았나

공사장 날림먼지를 훌훌 털어낸 바람이 눈을 움켜쥐자
할퀴고 긁힌 상처를 구만리까지 덮으며
눈이 쌓인다
인부들이 써내려가던 땀의 문장에 눈보라가 마침표를 찍는다

칼바람에 허기가 싱싱하게 눕는 밤
바람이 굴착기처럼 허공을 파헤쳐놓는다
길들이 꿈틀거리다가 휘어지다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국수가락처럼 말아놓은 밤이 바람을 후르르 삼킨다

누가 허공에 성긴 뼈들을 걸어놓았나

백색 깃발을 휘날리며 밤새도록 농성을 하던 눈이
나뭇가지에 고요히 얹혀 있다
일용직노동자들의 걸음을 삼천리까지 묶어놓는다

탁 트인 하늘
쇠창살이 흔들흔들 내려오고 있다
모든 사물에 채워진 수갑이 풀리지 않는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늙은 소나무 - 김영언  (0) 2019.12.19
별다방 - 이원규  (0) 2019.12.18
아버지의 유언 - 이우근  (0) 2019.12.18
펌프 - 장문석  (0) 2019.12.17
내가 보는 네가 나를 보고 있다면 - 고영민  (0) 2019.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