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유언 - 이우근

마루안 2019. 12. 18. 22:11



아버지의 유언 - 이우근



뽈뽈거리며 싸돌아다니지 말고,
못이기는 척 버틸 자리 찾거라
그저 엉덩이 무거운 놈이 결국엔 이기는 법
끈기는 재주를 이기는 한 방편이다
개꼬리 삼 년 묵혀도 황모 되는 법 없을지언정
이 악물고 지키며 아끼는 마음을 모으면
최소한 밥값은 할 것이다
신중하고 자중해라, 이렇게 말해도 니가 알 것이냐만
그러나, 불알 두 쪽 그 극명한 좌우의 중심에서
니 자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거라
사나이의 길, 사람의 길,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사는 것이 그런 것이다
나아가 삭은 인정과 습관이 된 양해가 담보된,
묵시적으로 체결된, 공짜에 가까운 담백한 거래다
돌아봐라, 일찍이 너는
목욕탕의 시원함을 뜨겁다고 항변하지 않았느냐
그런 너를 두고 어른들은 그저 웃지 않더냐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추억을 빌미 삼아 현실을 왜곡하고 싶진 않으나
하여 아쉬움이 많아 잠시 멈칫 하지만
아무 말 못하고 찬찬히 먼 산을 본다
가야할 곳이 거기 밖에 더 있으리
부디 오지 말라고, 나는 말하지 못한다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도서출판 선








어머니께 - 이우근



곰곰 생각해 보니
삶이란 것은
일정 부분 위탁받은 것,
나 혼자 훼손하지 못할 정신의 원탁
집 앞의 나무와 뒤뜰의 우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대의 나의 삶은
자식으로의 전이(轉移)와 투사(投射)를 위한
대리(代理)라는 것,
그것의 지속적인 연결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자유에의 의지와 공동체의 인격완성을 위한
소박한 배경, 담백한 지도자였지요
속절없는 순백의 독재자였지요
그렇게 물려받은 작은 깃발을
하얀 손수건처럼 흔들다가
조용히 이양(移讓)하는
긴 의식(儀式)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습니다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나만 생각했습니다


저의 사죄를
한치의 망설임 없이
거부하십시오
가꾸고 다듬지 못한 불찰은
영원한 죄로 남을 것입니다
내 몸이 불에 탈 때,
그때를 기다립니다.






# 이우근 시인은 경북 포항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5년 <문학선>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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