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숟가락의 연애법 - 윤현주

마루안 2019. 12. 15. 19:45



숟가락의 연애법 - 윤현주



시방 허기지고 쓸쓸한 나는 허름한 식당 구석에 앉아
낡은 스테인리스 숟가락과 연애 중이다
한때 니나노 판의 빛나는 가락이었던 숟가락이
모락모락 흰밥을 내 입속으로 퍼 나를 때
내 육체는 숙성한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고
헐떡거리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동안
숟가락은 내 입천장과 혓바닥을 골고루 애무한다
두 입술 사이를 후희처럼 천천히 빠져나온 뒤
식탁 위에 벌러덩 드러눕는 숟가락, 흡족하게
관계를 치른 사내처럼 부푼 배를 출렁이며
나는 식당 문을 나선다 그렇다면 숟가락은
나의 애인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오늘은 내 입속과 몸을 뜨겁게 달궜지만
어제는 행인 상인 노숙인 은행원 교사 학생 사장 종업원....
가리지 않고 허기지고 쓸쓸한 입속 애오라지 누볐을 테니
천하의 바람둥이라고 해야 하나
나와 당신은 숟가락을 매개로
입술을 교환하고 민감한 혓바닥마저 공유했으니
얽히고설킨 다각(多角)의 연인관계라고 해야 하나
목숨 줄을 놓지 않는 한 결코 숟가락을 놓지 않는
우리는 필생의 연적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한 사람의 입내 기억을 설렁설렁 헹구고
다른 입속에 들어가기 위해 정렬해 있는 숟가락은
저잣거리의 입들을 한통속으로 결속하는 도구이다
저 과묵하게 배 불리는 사랑법은
날마다 육체를 부활시키는 한 끼의 거룩한 성행위다



*시집, 맨발의 기억력, 산지니








헐렁한 시간 - 윤현주



머리 희끗희끗한 사내 서넛이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며 식당을 나선다
하나같이 다른 보폭과 걸음걸이에
각자도생의 이력이 선명하게 발자국 찍힌다
생계의 지렛대가 벌려 놓은 이빨과 이빨 사이,
한 30년 바짝 조였으나 이젠 헐거워져
용도 폐기를 앞둔 볼트와 너트의 틈새 같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헐렁한 시간,
이제는 더 죌 연장도 힘도 없는
사내들의 오늘 점심 메뉴는
회한과 불안을 엇썰어 넣은 김치찌개에
소주 두어 잔이 말없이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