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축하의 예외 - 신용목

마루안 2019. 12. 12. 22:41



축하의 예외 - 신용목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도 죄가 된다 그래서 너를 길 너머에 두고 걸었다 네가 길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걸었다 걸을 때마다 어둠과 눈이 마주쳤다 큰 호수가 있는 도시에 사는 완재 형과 지미는
둘째 딸을 낳았다고 했다 모든 딸들은 사랑하기 위해 자랄 테지만 나는 모든 딸들의 예외


산후조리원 가는 길
도무지 비껴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강물이 바닥을 지나치지 않는 것처럼


죄는 짓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


그 무렵 가장 무서운 것은 저녁이었다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서도 타고 있는 태양을 보면
가장 먼 곳으로부터 가장 아프게 날아오고 가장 가는 것이 가장 깊숙이 파고드는 채찍질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든 그루터기
전화 한 통에 태성이 형
시흥까지 와주었던 그날도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해 늦도록 이야기했지만
취하면 울던 선영도 말리던 형배 병현 영환 은영도 따라 울던 현주도
권수 천일 막내 여경 영록까지 다 부모가 되었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미형은


어떤 사랑은 나의 죄목이어서


어둠이 풀어놓는 미역 줄기를 한 소쿠리 펼쳐 받는 산
차창에 담가 손을 젓는다
맑은국을 들이켜듯 강이 저물 때 먼 도시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너에게
사랑하는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나에게 새로운 죄가 생겨났다는 소식


도무지 후회할 것이 없다
증인으로 자라는 딸들 앞에서 내 생은 현장검증하듯 지나갈 것이므로



*시집, 나의 끝 거창, 현대문학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 - 신용목



오클랜드 해변에서
파란 눈의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모래의 몸에서 솟아오른 민달팽이 눈처럼
건드리면,
모래 속으로 숨어들 것처럼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딛던 바닥,
그 아래로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


우리가 서로 발바닥을 맞대고
있었다는 사실, 때로는
엉덩이끼리


민달팽이가 오클랜드 해변에 매달려 있었다, 하얀 몸에서 솟아난 수많은 눈들을
아득한 천정, 찔린 듯 파란
바다를 향해 늘어뜨리며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안녕,
서쪽 바닷가 민달팽이 물빛으로 떠오르는 비행기를 향해
낮아지는 도시의 지붕들을 내려다볼 너를 향해
잘 지내,
파도처럼 손을 흔들던 하늘


그 높이가 사실은 바닥없는 낭떠러지였다는 것


집을 버렸다, 그것이 어느새 파란 눈의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는 이유이거나
반짝이는 모래 위에
남십자성, 한 번도 본 적 없는 별자리가 쓸리는 이유이거나
너를 잊은 이유


민달팽이는
엎드린 것인지 매달린 것인지
물을 떠나온 것인지 뭍을 떠나온 것인지


집을 버리고, 더는 숨을 바닥이 없는 몸


오클랜드 해변에서
민달팽이가 길게 나를 휘감고 있었다, 여기까지 날아와 기필코 나를 찾아내는
불안처럼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아무리 밟아도,
파란 눈의 불안은 죽지 않고 내 몸의 해변을 기어 다닌다
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