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 채비 - 최동희

마루안 2019. 11. 26. 21:39



겨울 채비 - 최동희



오랜 시간 아프다 보면
짧은 가을볕에 장바닥을 뒹구는
시든 배춧잎만 봐도
덩달아 풀이 죽고
겨우 몇 군데 작은 구멍이 난
벌레 먹은 배춧잎만 봐도
속절없이 너덜거리는 몸뚱이가 된다
듬성듬성 눈발이 날리는데도
차가운 밭에 그대로 누운 배추처럼
오래오래 몸 일으키지 못하다 보면
겨울 채비 끝내고 남은 싱싱한
배춧잎 쌈 한 장에도 울컥하여
차마 먹지 못한다



*시집, 풀밭의 철학, 천년의시작








약점 - 최동희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곤 기겁을 한다 휴대전화의 얇은 세로 부분으로 추락하면 아주 못 쓰게 된단다

유리문은 가운데를 치면 덤덤한데 각진 모서리를 치면 맥없이 주저앉는단다 필시 생명선을 건드린 탓이리라


손바닥에 그어놓은 실금처럼
아슬아슬한 약점은
들키기 좋게 되어있고
들키면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치명상을 입고 회생 불능으로 넘어지거나
강력한 백신이 되어 면역력을 높이거나


온몸이 급소인 우리네 삶은
천둥소리보다 무서운 것이 아버지 한숨 소리이고
땅이 갈리지는 일보다 심각한 것이 친구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고
뉴욕 증시의 주가 폭락보다 민감한 것이 마트의 물가 상승이다


허점투성이인 하루하루
약삭빠른 셈하지 말고
허술하게 사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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