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등부터 겨울이 온다 - 이윤훈

마루안 2019. 11. 27. 21:55



등부터 겨울이 온다 - 이윤훈



등부터 겨울이 온다

반쯤 열린 뒷문의 귀가

마른 풀 살랑이는 산그늘 쪽으로 기울고 

웅덩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다

그대의 등이 설핏 보였을 때 그곳이

그대의 속울음이 고였던 자리라는 걸 

나의 벽지라는 걸

시린 등으로 알았다 

그대 없어 등이 더 어둡고 시리다 

뒷문 곁 강아지 등에 손을 얹는다 

앞산 뒤켠으로 아직 남은 빛이 환하다

한때 비겁하게 비수를 감춘 적이 있다 

내 등에 통증이 왔다 

내 등이 얼마나 가파른지

지나는 바람이 일러주었다 

가끔 내 등에서 벌레 먹은 가랑잎이 서걱인다 

이제 쓸쓸한 등으로 나를 다 보이고 싶다 

서글픈 일로 서글프고 싶다

어둠이 오고 저마다 제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

군불을 지펴 지붕 위로 순한 연기를 피워 올려야겠다 

겨우내 그대의 등에 곤히 등을 대야겠다



*시집, 생의 볼륨을 높여요, 문학의전당








황천반점(黃泉飯店)에서 - 이윤훈



누구나 홀로 죽음과 길 떠나는 세상

얼키설키 뒤얽혀 지지고 볶고 산다

비굴 한 접시와 치욕 한 접시로

하루치의 치사량을 견디며

굽은 숟가락으로 하루씩 목숨을 퍼먹는다

무릉도원을 찾아 헤매다

삼거리 갈림길 가 황천반점에 몸을 부린다

마당 한복판 늙은 나무 아래

젖을 물리는 어미개가 얼마나 혀로 핥았나

밥그릇에 빛이 난다

나직한 지붕 아래

불처럼 뜨겁게 소리치며 지지고 볶는 부부

서리서리 얽힌 면 한 접시 뚝딱 내와 내 몸을 모신다

볶은 면 한 접시, 산 자의 한 끼

깨끗이 비운다

세상 한 귀퉁이 황천반점

저승길 마지막 식사 다시 예 와 들고 싶다






# 이윤훈 시인은 1960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아주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생의 볼륨을 높여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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