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몸이었다 - 김남권

마루안 2019. 9. 3. 22:32

 

 

바람의 몸이었다 - 김남권

 

 

바람이다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어느새부턴가 몸 안의 기운이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손바닥에 남은 한 줌의 공기만 당신 것이 되어 버렸다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두 발로는 버거워

지팡이를 짚고서도 비틀거린다

땅에서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발을 옮기는 것처럼

허공에 오래 머무르는 발걸음이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당신이 이승을 떠나기 위한 말줄임표...

자유로운 몸짓의 마지막 쉼표, 하나가

눈을 뜨고 있다

자식 여섯을 잉태하고 키우는 동안

당신의 전부를 먹이고도 양파껍질처럼 남은 것을,

세상의 모든 생명을 길러 내는데 쏟아 부었던

모성마저 단풍의 절정에서 낙엽이 된다

아, 바람이다 당신은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시집,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오감도

 

 

 

 

 

 

어른이 될 수 없는 남자 - 김남권

 

 

내 기억은 일곱 살 무렵의 화전민으로 살던

낡은 초가집에 머물러 있다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딸린 초가집의

싸립문을 나서면 유일한 놀이터였던

마당바위와 가재가 기어 다니던 작은 개울이

희미하게 떠 오른다

 

고개 하나를 넘어야

겨우 집 한 채를 만날 수 있었던 산골짜기에서

앞산의 잣나무와 여우울음 소리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렇게 오십 년이 흐르고 난 후, 나는

아이를 낳아 보지도 못하고

아이를 길러 보지도 못하고...

 

내 일곱 살 무렵의 기억 속에

정지되어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지아비라는 이름으로

나는 나 자신을 완전하게 키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있었지만

오랫동안 아버지가 아니었던 남자를

강물 속에 떠나보내고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그냥 버릴 수조차 없는 남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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