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누가 글썽인다 - 조항록

마루안 2019. 9. 3. 21:33

 

 

누가 글썽인다 - 조항록

 

 

어스름 새벽은 무겁다
완장을 차고 나의 멱살을 잡아채는 시간
난수표 같은 오늘을 여는 것이
길 없는 외길이다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이 점점 쉬워지고
눈물은 잊은 지 오래
눈물을 잊은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주섬주섬 적막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서면
검푸른 폐허에 발이 푹푹 빠지는 불안


나는 굳이 나로부터 고립되어
새벽별 앞에 하소연을 삼키고
속절없는 짐승인 것을 명심한다
맨발의 짐승이 속울음을 그렁대며 걸어가는
천로역정


거기 모르는 곳에서 내가 잊은 눈물로
누가 글썽인다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우리 만남은 - 조항록

 

 

너의 흉터가 담긴 소포를 받았다 발신지는 추억이었다 어디쯤에 빗발이 흩날리는지 한쪽 귀퉁이가 살짝 젖어 있었다 하염없이 몇 세기가 흘렀다 정말 그러한 듯 잊고 산 것이 너무 많았다 너의 눈동자보다 돌아서 떠나던 너의 등허리가 더 어른거렸다


틀림없이 상처가 아니라 흉터였다 불꽃이 재가 되어 다 아물었다는 것인지 안심하면서도 못내 서운했다 나를 부르던 순간들이 일제히 하늘로 올라가 물비늘 같은 과거가 되었다 아주 먼 데 있어 날이 개도 희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연을 믿지 않았다.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 <눈 한번 감았다 뜰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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