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찬미들, 안녕 - 정영

마루안 2019. 9. 1. 18:26



찬미들, 안녕 - 정영



잘못 배달된 피자였다


주문한 자들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미 길 잃고 내게 왔으므로
내칠 수 없는 연이었다


내가 세상에 배달되던 날도
주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집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처음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
모래구름이 내려와 심장의 봉분을 만들어주었다
태어난 이후로 내가 가장 빨개지자
바람의 영혼들이 인사했다
붉은 상자야, 안녕


나는 내 눈동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다락방 고양이들의 출산을 훔쳐보았다
검은 고양이가 점박이 새끼를 낳을 땐
어머니가 눈이 멀 것처럼 울었다
밤과 낮이 엉켜 나를 조금 닦아주었다
바람의 눈동자들이 인사했다
붉은 운명아, 안녕


우우-- 바람에게 불려나오는 내 붉은 찬미들!


촛농 되어 불타는 꿈틀거림들아, 안녕
불안에 떠는 그림자 속의 그림자야, 안녕
먼 훗날 카페에서 극장에서 태양의 해변에서
다시 떠들게 될 나의 이명들아, 안녕
눈감고 뛰어다니는 저주의 말들아, 안녕
나는 붉은 상자야!


나는 생애 여러번
주문한 적 없는 피자를 배불리 먹엇고
행복했고 아무 생각 없이 잠들었다


잘못 배달된 나여!



*시집, 평일의 고해, 창비








나 - 정영



나뭇잎들의 퇴화한 혀가
썩을 추억을 소곤댄다
기차는 내 헛기침을 덮어준다
더 일찍 떠났어야 했다


더듬이를 세운다
쓸모없어진 부위가 이미 많다


나뭇잎들의 퇴화한 다리가
내 불충분한 절망에 다리 걸어
무릎에서 썩은 사랑이 흐를 때
골목의 속울음이 내 절규를 덮어준다
더 일찍 떠나왔어야 했나


머리를 흔든다
쓸모없어진 생각이 이미 많다


너덜너덜한 날들을 기워 입었으나
생은 벌거벗은 걸 좋아했다
뒹굴수록 가시가 박히는
눈물까지 박제되어버릴 것 같은


꼬리 친다
쓸모없어진 사랑이 이미 너무 많다


몸을 버린다
쓸모없어진 내가 이미 너무 많다
내가 많다
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