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별똥별 - 김태형

마루안 2019. 9. 1. 19:07



별똥별 - 김태형



사라지는 것을 향해 빌어야 할 것은
오로지 사라지는 것뿐이었던가
삼십만 년만 더 간다면
등 뒤에서 끌어당기는 사나운 중력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영원한 고요의 바다를 지나갈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든 별이 되었을 것이다
간혹 자기를 놓쳐버린 구름들이
먼지와 얼음조각들이
손목을 긋고 떨어져 나와
송두리째 자신을 불태워 자진해버리기도 한다
한순간을 위해서였다면 별은
다른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을 것이다
서너 걸음마다 뒤미처 떠오르는 생각처럼
다 타고도 남은 것이 있다면
저 잿빛으로 환한
오래고 오랜 밤하늘 때문이다
이런 것이다 나와 당신과 바람과 황무지와
끝도 없이 펼쳐진 이 광막한 어둠은
새로 생긴 실핏줄 하나가 눈망울 속을 지나가듯
저릿하게 저릿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게 아니라



*시집, 고백이라는 장르, 출판사 장롱








별 - 김태형



다 저문 석양 앞에 겨우 무릎을 대고 앉아 있다
내가 갈 수 없는 저곳에서
저녁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갈색 염소와 어느 사내의 눈빛을 닮은 양들이
작고 둥근 똥을 싸며 지평선을 건너오기 시작한다
한평생 기른 가축들을 끌고 누군가
밤하늘을 건너가려고 한다
내겐 기르던 개마저도 떠났다
종일 물 한 모금만으로도 배고프지 않았는데
밤새 저 순한 가축들을 따라서
초원의 풀들을 모조리 뜯어먹고 싶다
내 텅 빈 눈빛마저 뿌리째 뜯어먹고 싶다
짐승의 썩은 내장처럼
찢어져 나뒹구는 타이어 조각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모르는 녹슨 쇠붙이와
돌조각과 모래와
천천히 제 무거운 몸을 끌며 지나가다
문득 검은 비를 내리는
구름이 있다
지평선에 반쯤 걸쳐 있는 흐린 별자리가 있다
나는 염소자리
느릿느릿 풀을 뜯고 지나간 자리에
이제 막 새로 생긴 검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 김태형 시인은 1971년 서울 출생으로 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고백이라는 장르>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의 몸이었다 - 김남권  (0) 2019.09.03
누가 글썽인다 - 조항록  (0) 2019.09.03
찬미들, 안녕 - 정영  (0) 2019.09.01
어느 날 종로 3가에서 - 최동희  (0) 2019.09.01
슬픔에 대한 나의 혐의 - 이성배  (0) 201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