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날 종로 3가에서 - 최동희

마루안 2019. 9. 1. 18:12



어느 날 종로 3가에서 - 최동희



그들은 추억이 있는 곳으로 갔을 뿐이다
바람 든 무처럼
제 몸에 어설픈 구멍을 뚫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그곳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러 간다


가끔 옛날 영화를 본다
더빙된 성우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어색하고 엉성한 이야기들
화면을 가득 채운 빗줄기를 타고
그들의 반짝이는 추억들이 흘러내린다


유행을 타지 않는 옷들은 힘이 없다
오늘이 어제를 나무라고
초조한 내일은 퉁명스럽기 짝이 없어
내리쏟아지는 여름 햇살에
감았던 눈을 뜰 수가 없다


바람은 늘 한쪽 방향으로만 분다
바람은 강물을 밀치고
강물은 그들의 등을 깎아내며
그곳으로 몰아붙인다
종로는 지친 연어들로 언제나 붐빈다



*시집, 풀밭의 철학, 천년의시작








100세 시대의 애환 - 최동희



진시황의 허황된 꿈은
죽음의 숙명에 대한
가장 진실한 함수이다


생로병사의 끄트머리에서
어떻게든 마지막을 미루는
정직한 발버둥


장하게 이루어낸 100세 시대
30년을 벌어 70년을 살아야 하는
계산이 안 되는 살벌한 도박


알량한 연금으로 버텨내는 늙음은
U턴도 도돌이표도 없는 시간에
담보도 없이 저당 잡힌 몸이 된다


오래 사는 것이 때론 형벌인
100세 시대의 황당한 모순 앞에
노인의 지혜는 서글프다


그래도 브레이크가 없는
장수에 대한 욕망은
한 번도 양보를 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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