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 자정 조금 넘어가는 이런 밤에 - 박서영

마루안 2019. 8. 19. 19:49



아, 자정 조금 넘어가는 이런 밤에 - 박서영



사막의 유목민들이
젖 짜는 소를 그려놓거나
여자를 태운 소를 그려놓고 미소 짓는, 그림을
하나 갖게 되었지


어릴 땐 공동묘지 주변에 살았었고
여섯 살의 방랑, 일곱 살의 유랑
나이를 세는 일이란 농담에 쓸쓸함을 덧씌워보는 일일 뿐
세월은 늙었고 나는 늙지 않았네
모두가 다 날씨의 영향일 뿐이라는
충동이거나 농담일 뿐이라는 당신의 말에도
방랑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였는데


난 몸을 관통하는 눈물을 쏟아냈지
몰려드는 구경꾼을 미소로 맞이하면서
적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지
눈물이 사랑의 힘으로 자꾸 달라붙어
무늬를 만드는 이런 저녁
아, 자정 조금 넘어가는 이런 밤에



*시집,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사람








밤의 외로움 - 박서영



열대야를 고장 난 선풍기 한 대로 보냈다
빗나간 목을 두꺼운 스카치테이프로 동여맨


밤새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에 정이 들었나
선풍기를 끄면 잠이 오지 않는다


밤새 텔레비전을 켜놓고 자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이서 한꺼번에 한 사람을 지목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달은 병을 앓다가 그들을 놓아주었다


나는 달의 뼈 하나를 집어 뭔가 쓰고
쓰다가 지우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괜스레 선풍기의 미풍 약풍 강풍 버튼을 번갈아 눌러보았다
죽기 전에 저 고장 난 선풍기를 가장 먼저 버려야겠다고
심장에 몇 마디 꾹꾹 매장해 보는 가을 밤
선풍기는 어떤 무늬를 가진 새처럼 울기 시작했다


고장 난 선풍기 속에 부엉이가 사나
밤의 외로움은 날개를 접고 부엉부엉 울다가
슬픔을 탈탈탈탈 털어내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선풍기에서 깃털 같은 바람이 쏟아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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