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대장내시경 - 박일만

마루안 2019. 8. 20. 22:33



대장내시경 - 박일만



남은 날들을 진단하려고
아랫도리 벌려 깊숙이 본다는 거
참 어처구니없는 체위다
지난밤부터 비우기 시작한
수십 해의 내력이 허전하다
실눈을 뜬 촉수로 속내를 본다는 거
들킨 것이 많다
숨긴 것도 꽤 많다
게다가 내가 나를 제거한다는 거
참 다행이다 싶은,
밝은 햇살에 나를 내다 말려서라도
뒤집어 보고 싶다는 거
아래로 흘러내리는 진물을 훔쳐 내는 거
죽기 좋은 계절을 택해
전생과 후생을 들여다본다는 거



*시집, 뼈의 속도, 실천문학사








지구의 저녁 한때 2 - 박일만



살림을 줄여 이사를 마치고
늦은 밥을 짓는
당신의 뒤허리는 저녁을 닮아 있다


한 그릇의 밥만큼이나 간절해


태초의 저녁인 듯
창 너머 발아래는 검은 허방이 흐르고
나는 유성처럼 공중의 미아가 된다


높이 오른다는
높은 곳이 낮은 곳이라는
누추한 세간이 거처를 높게 하는


시대의 오만함으로 누군가는 낮은 땅을
넓게 차지하고
이 저녁
누군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아뜩함으로


시대가 그렇다


살림을 줄여 나가자 덩달아
몸피 줄어드는 희망이
구름 근처 임대아파트 사이를 배회한다


늦은 밥을 먹고 나면
이제 구름 위의 잠이겠구나
잠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