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리데기를 새기다 - 기혁

마루안 2019. 8. 18. 21:29



바리데기를 새기다 - 기혁



꽃이 눈물을 마시며 자란다고 생각한 이후
이별을 받들던 풍요와
미래를 부숴버린 웃음바다 꽃 내음이다


무덤 위에 피어난 꽃이
아무런 가책도 없이 흔들릴 때
식물의 생식기라든가, 심장까지 이어진 내장을 떠올리면
가시를 나눠 가진 몸들의
유전병 같은 저녁이 떠오른다


백 년 전 해골이 자신의 머리칼에 휘감기듯 꽃은 지는 것이 아니라 말려든다는 생각
멀리 꽃 내음에 취해 자신이 다녀간 자리에 또다시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 스물네 송이 가지런히 꽃다발을 만들고 방랑이라는 살색 포장지를 두르고
바리데기는 사랑이 웅크렸던 진흙탕을 보았을지 모른다
때로는 자궁 같았던 때로는 무덤 같았던
방랑은 얼마나 많은 벌 떼와 나비와 바람을 종말했던가


꽃잎에 숨겨진 가시가 외부에서 외부로 어긋난 인연의 실밥을 드러내주었지만
가시는 기실 눈물을 식수로 쓴 꽃들의 내장
내부에서 외부로 외쳐진 날카로운 나르시시즘이었다


강바닥에 썩어가는 가슴도 한때는 꽃으로 문지르던 사연입니다 시대의 꽃 내음에 절망하던 청춘들은 닳아빠진 속내를 꺼내 문신을 새깁니다 목덜미에 피어난 꽃들도 꽃말을 지니고 있고 당신의 모국어가 까닭 없이 베끼던 사랑과 존나에 흔들립니다 시궁창을 뒹굴던 두 눈으로 가슴을 매만지면 한책방 가득한 설화들이 페이지를 넘깁니다 작자 미상의 결말은 얼굴 속 해골이 또 다른 해골을 향해 내밀던 눈빛이었습니다


무심코 주워 든 낙엽의 뒤편에도
잎맥을 흐르던 눈물이 있고 다시금 누군가의 강이 되어
생과 재생의 침묵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씻겨주었지만
어떤 깨끗한 청춘도 에미애비 없는 당분간처럼 물려줄 것이 없었다


망가진 개 떼 같은 봄날
바리데기가 만진 두 눈이 햇살을 이끌고 온다
견고한 삶일수록 자주 문턱을 잊는다 했다 곁에서부터 시들어가던 꽃잎처럼
오래된 사람을 문지르면 뼈다귀가 먼저 피부를 운다



​*기혁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 문학과지성








봄은 한쪽 눈을 감고 온다 - 기혁


매일 밤 심장을 조준하던 한 호흡의 총알
살아 있다는 건 바짝 엎드려 불을 당기는 일이지
총알이 당신을 꿰뚫고 가쁜 숨으로 되돌아올 때​
꼼짝달싹 못 하고 총알받이가 되어가는 일이지​
숭숭 구멍이 뚫려 이제는 허공만 남은 사랑​
오발탄이 박히면 점점 더 넓어지던 시간의 격전지에서​
생포한 슬픔들을 이끌고 다니는 일이지​
단단히 포승줄을 묶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더 많은 슬픔들과 교환하는 일이지​
옷깃을 적신 피비린내를 추억으로 닦아내며​
전쟁터에서 받은 첫아이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평화처럼 부르던 날 햇살은 꼭 한쪽 눈을 찡그리라 하는데​
다시 자세를 잡고 아지랑이를 겨누라고 하는데​
살아 있다는 건 표적을 물려주는 일이지​
남은 총알 몇 개 아이의 조막손에 쥐여주면서​
영영 당신을 겨눠야 하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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