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흐린 거리 - 이성배
여름 저녁 골목은
현상액에서 방금 꺼낸 흑백사진처럼 축축했다.
리어카 두 대가 좁은 골목을 아슬아슬 비켜간다.
한쪽 다리를 저는 노인은 리어카를 밀고
허리가 심하게 굽은 노인은 리어카를 끌고 간다.
서로 폐지를 주운 골목의 방향은 노출에 실패한 사진처럼
충분히 어두워지고 있다.
컵라면 한 끼와 폐지 몇 킬로그램이 삶의 총량이 될 수도 있다.
얼마 후 가로등이 일제히 점등 되는 순간,
리어카의 뒷모습이 보이는 골목은 필름 타래처럼 검게 탈 것이다.
정확히 초점이 맞았다고 믿고 싶을 뿐,
조금 덜 흐릿한 배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희망 수리 중 - 이성배
오래된 주택가 골목,
담장 두어 칸 허물고 마당 한쪽에 만든 두 평 식당.
맨 처음은 <분식나라>
대부분의 골목 사람들은 밥심으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취급 요리의 품격을 강화한 <황포식당>
식당 앞 파라솔에 앉아 누가 점잖게 삼계탕을 먹을지 온 동네가 궁금해했다.
다시 초심으로 <엄마 국수>
대부분 엄마의 국수를 먹었던 날은
라면 이야기를 꺼냈다가 등짝을 후려 맞은 서러운 저녁이었다.
오늘도 늦는다 <순정 포차>
막걸리 한 잔 오백 원, 사람들이 제법 들었는데
온통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다.
연속된 실패에 굴하지 않는 비장함 <황칠 순대국집>
차라리 그냥 순댓국집이었다면,
의심은 쉽게 바뀌지 않는 골목의 덕목이었다.
반 년 사이 현수막 간판은 자꾸 덧대져 비에 젖는 날이면
황포하고 순정이하고 황칠이하고 젓가락 장단에 둘러앉아
섞어찌개를 먹는다.
아직 세입자를 찾지 못한 식당은 희망 수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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