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편지를 부치다 - 오창렬
끈적거리는 것에 멈칫했어요 오래된 길은
붙잡는 것으로 나를 달아나게 했어요
편지를 넣는데 거미줄이 우체통 그 빨간 입에
얽혀있던 것이지요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말도 말이지만
내 붉은 입술의 어제와 오늘이 떠올랐어요
벌겋게 피가 흐르는 시간에도 어떤 지경에서는
죽음의 바람이 분다는 것 몸뚱이 어디론가
生의 구멍에 거미가 줄을 친다는 것
누구를 부른지 오래 되었고 젖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지는 더 오래여서 길이 오래 묵었던 거죠
나를 달아나게 했던 마음을 걷고
우체통 속으로 한 통의 편지를 밀어 넣었어요
청춘이 내민 내 손을 닮은 편지
편지 봉투가 흰 이유와 간혹 얹히던 꽃무늬를 생각하는 잠시
편지 속 하얀 말들이 줄줄이 기어 나와
묵정밭 일구고 다시 길을 맑혀 놓을 테죠
우체통에 편지를 넣자
텅,
어둠 저편에서 문 열리는 소리
내 안의 흉가 거미줄 한 채가 어두워지는 순간이죠
*시집, 서로 따뜻하다, 황금알
저문 봄날에도 - 오창렬
울밑에 호박씨 하나 심는다
호박꽃도 꽃이냐고 사람들이 웃는 꽃
반짝 반짝 울 높이 얹어 두고 넝쿨이 가는 길
울 따라 햇살 따라 우리도 가 보는 거야
봄에서 여름까지 가을까지 뻗어 보는
밤낮으로 덩쿨 덩쿨 엉켜 보는
엉키고 설키는 것이 삶이라 믿으며
양손에 애호박 몇 개 저울의 추처럼 달고
비틀거리지 않는 꿈 얽어 보는 거야
어쩌다 우리의 꿈밭을 엿보는 이에겐
푸른 얼굴 내밀어 웃어도 보지만
이파리 무성한 속에 한 덩이 꿈을 둥글리는 일
가을까지 실하게 영그는 일 잊지 않는다
높이보다 얼마나 잘 엉키느냐가 중요한 삶에서
덤불처럼 엉키고 잘 익은 알 하나로 남는 일
삶의 덩굴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구들목에 호박씨 마르는 겨울 내내
만지작만지작 우리의 생각도 말릴 일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어머니의 환속 - 김남권 (0) | 2019.08.21 |
---|---|
대장내시경 - 박일만 (0) | 2019.08.20 |
아, 자정 조금 넘어가는 이런 밤에 - 박서영 (0) | 2019.08.19 |
초점 흐린 거리 - 이성배 (0) | 2019.08.19 |
바리데기를 새기다 - 기혁 (0) | 2019.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