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초점 흐린 거리 - 이성배

마루안 2019. 8. 19. 19:11

 

 

초점 흐린 거리 - 이성배

 

 

여름 저녁 골목은

현상액에서 방금 꺼낸 흑백사진처럼 축축했다.

 

리어카 두 대가 좁은 골목을 아슬아슬 비켜간다.

 

한쪽 다리를 저는 노인은 리어카를 밀고

허리가 심하게 굽은 노인은 리어카를 끌고 간다.

 

서로 폐지를 주운 골목의 방향은 노출에 실패한 사진처럼

충분히 어두워지고 있다.

 

컵라면 한 끼와 폐지 몇 킬로그램이 삶의 총량이 될 수도 있다.

 

얼마 후 가로등이 일제히 점등 되는 순간,

리어카의 뒷모습이 보이는 골목은 필름 타래처럼 검게 탈 것이다.

 

정확히 초점이 맞았다고 믿고 싶을 뿐,

조금 덜 흐릿한 배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희망 수리 중 - 이성배

 

 

오래된 주택가 골목,

담장 두어 칸 허물고 마당 한쪽에 만든 두 평 식당.

 

맨 처음은 <분식나라>

대부분의 골목 사람들은 밥심으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취급 요리의 품격을 강화한 <황포식당>

식당 앞 파라솔에 앉아 누가 점잖게 삼계탕을 먹을지 온 동네가 궁금해했다.

다시 초심으로 <엄마 국수>

대부분 엄마의 국수를 먹었던 날은

라면 이야기를 꺼냈다가 등짝을 후려 맞은 서러운 저녁이었다.

오늘도 늦는다 <순정 포차>

막걸리 한 잔 오백 원, 사람들이 제법 들었는데

온통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다.

연속된 실패에 굴하지 않는 비장함 <황칠 순대국집>

차라리 그냥 순댓국집이었다면,

의심은 쉽게 바뀌지 않는 골목의 덕목이었다.

 

반 년 사이 현수막 간판은 자꾸 덧대져 비에 젖는 날이면

황포하고 순정이하고 황칠이하고 젓가락 장단에 둘러앉아

섞어찌개를 먹는다.

 

아직 세입자를 찾지 못한 식당은 희망 수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