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인도 - 이영광

마루안 2019. 8. 16. 21:51



무인도 - 이영광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을 때면 어디
섬으로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결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죄짓고 어떻게 벌받아야 하는지
힘없이 알 것 같을 때는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
그 망망대해를 수혈받고 싶다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견디고 안녕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만 살아야 하는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이면 반드시,
그 절해고도에 가고 싶다
가서, 모든 기정사실을 포기하고 한 백 년
징역 살고 싶다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머릿속 메모리 칩을 그 천국에 압수당하고
만기 출소해서
이 신기한 지옥으로,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또 건너오고 싶다



*시집,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황금빛 누더기 - 이영광



기본 영어 부정사 단원에 나오던 이상한 문장:
그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허사(虛辭)란 게 원래 이상한 거지만,
그는 전쟁 노예로라도 끌려갔던 걸까
사형수였을까


그립기도 무섭기도 한 고향에 못 갈 것만 같아져
어린 나는 훌쩍거렸는데,
도회에 처음 나올 적, 동구 다리 밑 봄볕에 나앉아 이 잡던
장발 거지 생각이 났더랬다
난 사십 년 후의 너야, 말 건네듯, 씨익 웃던
그의 손에 번쩍이던 누더기


전장과 형장을 나는 모르고
방랑을 더욱 모르지만
작은 곳 후미진 공중의 둥지에 연년이 똬리 틀고 앉아
갇히며 떠돌며 사십 년을 흘려보냈지만,
생각느니, 그는 그가 아니었을까
안개 같은 이국의 문장을 탈출해 조선 천지 어느 산골 아침에
예언질하듯, 내 어린 발치에서 흥얼대지 않았을까


그의 전장 그의 형장 그의 움막 부러워라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곤 없었으나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있었을 그 거지 자식,
부러워라 아무도 가두지 않은 곳에 갇혀
생각느니, 이 별은 길 잃은 별


버드나무에 양말짝 널어놓고 종이때기에 뭔가 끼적대던
그는 나였을까
그러나 내 별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없는 곳,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없는 곳
최후엔 껍질을 벗기듯 누가 벗겨냈을 그
황금빛 누더기 그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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