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간의 필사자 - 김학중

마루안 2019. 8. 12. 22:11



시간의 필사자 - 김학중



시간은 몸도 없이 변신을 한다
변신을 하면 시간이 되고
그것은 시간의 몸이 된다
그 몸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모르니
거기에 있다


오랜 후에
누군가는 그 몸을 시간의 필사자라고 했다


어느 날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불러내기 위해 필사자들은
해와 달에서 베껴왔다
기록의 문자는 점점 뽀족해진다
매일 낡아간다
필사자들의 몸은 시간에게 주어지는 것
그들은 시간을 필사하면서
늙고, 오래전의 인간보다
더 빨리 늙어간다


필사란 그들을 시간이 가져가도록
그들을 시간으로 만들도록 허락한 것이다.



*시집, 창세, 문학동네








시계탑 이야기 - 김학중



광장에 바깥이 세워지고 시계탑의 시계가 멈추었다


멈춘 시간들이 함부로 버려지고 있다
자신이 만든 시계를 분해하고 있는 시계공
무심하다. 누군가 멈춘 시간 속에 침몰하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몸을 던진다. 누구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사람들은 천천히 시선을 시계공 쪽으로 옮긴다
그가 세운 시계탑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함성에 시계가 놀란다
아무도 안아주지 않던 시계의 거대한 팔은 그날
시간이 멈춘 곳을 꼿꼿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시간 속에서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듯이
서로를 안고 환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을까
그 자리에서 누구도 시계공을 찾지 못했다


시간의 바깥에서 시계공은 톱니가 빠진 시간의 이빨을 다시 맞추고
천천히 시계를 조립했다


바깥이 천천히 지워졌다


흩어지는 사람들은 서로의 팔로 서로를 가리키고
시계탑은 그들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 김학중 시인은 1977년 서울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창세>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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