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열흘 붉은 꽃 없다 - 이산하

마루안 2018. 8. 7. 13:39

 

 

열흘 붉은 꽃 없다 - 이산하


한 번에 다 필 수도 없겠지만
한 번에 다 질 수도 없겠지
피고 지는 것이 어느 날, 문득
득음의 경지에 이른
물방울 속의 먼지처럼
보이다가도 안 보이지
한 번 붉은 잎들
두 번 붉지 않을 꽃들
너희들은 어찌하여
바라보는 눈의 깊이와
받아들이는 마음의 넓이도 없이
다만, 피었으므로 지는가
제 무늬 고운 줄 모르고
제 빛깔 고유한 줄 모르면
차라리 피지나 말지
차라리 붉지나 말지
어쩌자고
깊어가는 먼지의 심연처럼
푸른 상처만 어루만지나
어쩌자고
뒤돌아볼 힘도 없이
그 먼지의 무늬만 세느냐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문학동네


 

 



어긋나는 생(生) - 이산하


내 몸에 나 있는 흉터들
내 몸에 묻어 있는 먼지들
이런 것들이
불현듯 나를 일깨운다
오늘 아침,
그 먼지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 몸 흉터 무늬와
너무
닮아 있었다

아하,
세월을 상기시키는 것과
세월을 덮어버리는 것이
이토록 맞물려 있다니,
어긋나는 생들이여
그 어긋남이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가

 





*自序

500년마다 한 번씩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 불을 피운 다음,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타 죽는 새가 있다면 믿겠는가.
그리고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 어린 새로 거듭 태어난다면
또한 믿겠는가.
게다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버린 지
오래된 새라면
더욱이나 믿겠는가.
나는 믿는다.
그 '기특한 향나무새'가 내 가슴속에 살고 있으니까.
다만, 500년이 50년으로 줄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10년이나 남았구나.
(....)

벌써 가슴이 뜨거워져온다.
새가 또 향나무를 쌓는 모양이다.
이번엔 설마 예행연습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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