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든 축제엔 비가 내린다 - 서규정

마루안 2018. 7. 11. 22:32

 

 

모든 축제엔 비가 내린다 - 서규정


고통이 오면 고스란히 당하며 살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된다
죽어서도 숨 가쁜 자
그 숨 잠시 멈춰라
뼈에 사무칠수록
새록새록 군침이 돌아
말이 풀로 솟아야 하는 것이니
발성은 발성으로 터지지도 않고
들키지도 않게 참고 또 참아
먹먹하고 먹먹한 것은
침묵이 아니라
완창이다
풀이 바람에 다소곳 흔들린다
꼭 다문 소리가 소리로 통하듯

통통 여문 빗방울을 두드리듯이
그냥 받아 넘기듯이
무덤들은 우산처럼 팽팽하게 타오른다

 

*시집,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작가세계

 

 

 

 

 

 

나는 창고아저씨 - 서규정

 

 

붉은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 편에 서성이다가

신호등 바뀌면 눈치 볼 것 없이 바로 길 건너거나

사설학원 원장 뒤에서

초임교사의 눈빛이 젤 반짝거린다고 씹거나

이십 년 살고 이혼하는 부부 곁에 서서

깨진 유리창 돌아볼 것 없다

생은 배반의 속도로 빛나는 것이라고

써먹은 말 또 써먹고도, 잠잠하면 잠시도 못 참아

 

건너뛰고 뛰어 빈칸이 많은, 나는 창고아저씨

 

빛바랜 사진 같은 청춘이 그랬고

이십대, 절간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림자 몇 잎

삼십대, 단순노동자로 걸린 공사판에서 꾸역꾸역

사십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오십대, 처음으로 배를 탔었고

 

빈칸이 짐칸이었던 거지

백내장 수술 뒤엔 두 눈 부비며

섬과 섬 사이로 턱, 턱을 밀면 밀물인가요

그물 한 자락 싣지도 못한 쌍끌이 어선의

부웅부웅 헛 고동소리보다

더 큰 숨을 몰아쉬듯, 참을 수 없이 북적대는 이 결항의 장르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한국해양문학상, 부산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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