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무와 두 아이, 두 사람과 나 - 박석준

마루안 2018. 6. 24. 19:57

 

 

나무와 두 아이, 두 사람과 나 - 박석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몇 년 동안이나 걷던 그 길을
돌아다보았다, 이사하는 날에.
내가 걷던 그 길에는 은행, 은행나무들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밤
내가 독백을 털며 스치던 말하지 않는 나무였다.

3년 전이나 되었을까. 그 길을 따라
고등학교 하나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 애는 혼자서도 잘 놀다가
밤이 깊었다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출근을 했다.
체 게바라, 기형도, 김광석의 이야기와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다 좋아하다가
어느 날부턴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와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게바라 라이터, 입 속의 검은 잎, 사랑했지만....,
사랑했던가. 그러다가 그 애는 이삼 년 사이에
청년이 되었다. 길을 찾던 그 청년, 비를 맞고서
시간의 색깔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삶 자체가 시간의 색깔인 것도 같아요, 하며.

내가 길을 찾다가 누군가를 찾아가고 싶어진 여름밤
제가 찾아가고 싶은데, 지금 뭐 하세요?
석양이 내게 안부를 물었다.

서성거리다가 인생의 중반길에 온 나는
그리워할 사람이 많았다.
내가 이사를 한 후에도 그대로 있을
그 나무들.....
돌아다볼 여유도 없이.


*시집, <카페, 가난한 비>, 푸른사상사

 

 




비 내리는 날 - 박석준


장미를 품고 방랑하던 사람, 고독했던 화가, 그 건너에 석양, 별이 빛나는 밤.
인생을 돌아다보던 파스토랄도, 그것 밖의 장면도 이제는 늙어가는 과거의 한 빨간색이다.
사람들에겐 사이가 있어서 기약을 하기가 어렵다.
시간은 지향하는 곳으로 따라와 어떤 사람 혹은 어린 사람을 딴 곳에 둔다.
과거로 떠난 사람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비가 내린다, 너무나도 여러 갈래로 쪼개져버려 조심해야 할 것 같은 가난한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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